손드하임은 뮤지컬신
2014 메트 <맥베스> 감상 본문
지휘: 파비오 루이지
연출: 아드리안 노블
출연: 젤리코 루치치(맥베스), 안나 네트렙코(레이디 맥베스), 르네 파페(뱅코우), 조셉 칼레야(맥더프)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최근 이상하게 '피에타, 리스페토, 아모레'에 꽂혔다. 이 블루레이를 산 이유도 그 때문인데, 이유가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오페라 입덕 계기가 베르디여서 특히 그랬는지 다른 작곡가들은 그냥 한번쯤 듣고 넘어가거나 좋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다가도 베르디만 유난히 눈에 귀에 밟히더라. 그리고 또 실러가 독일의 셰선생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베르디의 실러를 열심히 팠으니 베르디의 셰익스피어도 한번 파 보자는 새끼 오페라덕의 마음이 있었다. 독일 아마존에서 주문한거라 한국어자막은 없을 줄 알았는데 있더라.
오버츄어가 굉장히 좋았다. 작품 속으로 대번에 몰입하게 할 만한 연주였음. 베르디가 천재거나 지휘자가 기깔나게 달렸거나 둘 다이거나. 아무튼 서곡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마녀들은 은근 귀여운 점이 있었는데, 영화에서 봤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존재'의 느낌과는 좀 멀었다. 일단 인간 같기는 한데.. 맥베스랑 뱅코우가 단박에 인간이냐 아니냐 물어대서 당황했음.ㅋㅋ
네트렙코의 레이디맥베스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프라노를 좀 듣기 힘들어해서 이 프로덕션에서 네트렙코가 잘했고 못했고를 내가 판단할 만한 건 아닌 것 같다. 네트렙코 음색도 음습하고 어두운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깊게 찢어지는 소리가 레이디맥베스와 잘 맞아 보였다.
던컨 왕을 죽이고 나서 손에 피를 묻히고 돌아온 맥베스가 "온 바닷물을 다 쓴다고 해도 이 손의 피를 씻어내지 못할 것이다."라며 혼란스러워하며 들어온다. 그러자 레이디맥베스가 잠든 왕의 시종의 손에 직접 범행에 사용된 단검을 들려주고 와서는 "이것 보세요, 내 손도 당신의 것과 같지만 물로 쉽게 씻길 것입니다."라고 안심시키는 장면. 여기서 나오는 듀엣이 그 유명한 'Fatal mia Donna'이다. 이 프로덕션에서는 선명한 붉은 핏빛과 그들을 비추는 하나의 전등이 인상깊었다. 네트렙코의 연기는 조금 띠용스러웠지만, 오페라를 연기 보려고 보는 건 아니라고 하니까.. 내 안의 뮤덕 자아는 조금 접어두는 것으로 하겠다.
이 장면에서 신기했던 건 노래하는 내용이나 상황에 비해 멜로디가 희한하게 밝게 들렸다는 점이다. 이 '밝음'은 비단 이 장면 뿐 아니라 작품 전체적으로 문득문득 '와.. 내용에 비해 좀 경쾌한 거 아냐?'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는데 베르디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내가 모르는 어떤 사조적 특징인건지, 그냥 단순히 내가 좀 잘못 들은 건지.
던컨 왕의 시해 소식을 모두가 전해 듣는 '지옥이여 입을 열어라'에서 인물들의 심리가 여러 갈래로 교차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 음악이 진짜 좋은데, 거기에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이 얹히니 제법 두근거리더라. "신이여, 첫 번째 살인자 카인의 이마에 찍으셨던 것처럼 이 살인자에게도 낙인을 찍으소서" 하는 가사를 레이디맥베스와 맥베스 역시 합창 안에서 부르는 모습도 좋았고, 뱅코우가 진짜 범인을 알아채고 총을 들어올리려 하자 맥더프가 저지하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배신당하는 뱅코우는 귀엽기 짝이 없었다. 뱅코우가 분량짠내나는 캐릭터라는 게 아쉬울 뿐... 뱅코우 캐릭터의 딜레마라고 생각된다. 이 아리아를 죽기 전에 불러야 하는데, 죽기 전에는 뱅코우가 그리 임팩트 있는 역할이 아니지 않은가. 뱅코우는 죽어서 사는 캐릭터라고.ㅠㅠ
연회 장면은 특히 좋았다. 예언대로 맥베스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고, 성 안에서 귀족들을 모아 연회를 베푸는 장면. 이 씬이 정말 좋았다. 파페 뱅코우가 죽기 전에 관객한텐 어필도 안 되는 아리아를 기깔나게 뽑고 나서는 유령이 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연회 장면에 와서야 뱅코우의 진정한 위엄(!!)이 드러난단 말이다!! 맥베스의 눈에만 보이는, 피칠갑한 영혼으로 등장한 파페 뱅코우는 너무 섹시했다...... 최고...... 파페 최고 잘생김.......
맥베스가 뱅코우의 환영을 보며 발작하자, 연회장에 있는 귀족들이 눈을 굴리며 맥베스를 쳐다보는 연출이 인상깊었다. 그 두 눈을 맥베스는 견딜 수 없었을 것.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보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그 와중에도 맥베스를 진정시키며 진정한 왕의 면모를 보여준다. 네트렙코 레맥이 루치치 맥을 끌어당겨 힘으로 억지로 춤추게 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권력과 지위보전을 향한 레맥의 강한 열망이 보이는 행동이었음. 맥베스 없었으면 레이디 맥베스가 마녀들의 예언 받아서 덩컨 죽이고 젊고 예쁜 남편 맞아 자손내내 왕좌를 물려줬을텐데, 하필 남편이 맥베스라서 망한 케이스다.
레이디 맥베스가 그런 캐릭터였기 때문에 처음엔 이 사람이 왜 죄책감에 미쳐서 죽는건지 이해가 안 됐다.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면 모든 이유를 들어 정당화했을 인간이지 않은가. 어째서 이 몽유병 장면이 가능한가, 어째서 이 캐릭터에게 매드 씬이 주어지는가.
그러다가 결론을 내렸다. 레이디 맥베스는 죽는 순간까지도 던컨 왕 시해나 뱅코우 암살같은 일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지만 맥베스가 무고한 맥더프의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것을 보고 미쳤을 거라고.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희생이 아닌 무고한 살해 내지는 학살이 아니었던가. 그것까지는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참 잘 만들어진 캐릭터 아닌가. 나는 이렇게까지 도덕적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오페라 여성 캐릭터를 본 일이 없다. 사랑도 중요치 않고, 정결도 순수도 중요치 않다. Tugend라는 단어 안에 들어가는 모든 의미는 레이디 맥베스에게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오세요, 맥베스. 순수함이 당신을 책망하지 않도록." 이라는 가사가 그녀를 대신해주고 있다. 뉘우치는 모습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러 작품에서 덕성에 굴복해 뉘우치는 악녀만 보니까 이런거에도 홀라당 넘어가게 되어버렸다. 실러 망할 인간.
피에타, 리스페토, 아모레는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루치치가 연기를 하는건지 안하는건지 구별할수가 없었음. 분명히 감정 잡고 있는데 또 어떻게보면 그냥 리사이틀에서 부르는것처럼 보이기도 하고.ㅋㅋㅋ 인상깊지는 않았다. 이 아리아때문에 보기 시작한 작품인데,, 이러나 저러나 가사는 기가 막혔다. "연민도, 명예도, 사랑도. 모두 사라졌다. 오직 저주만이 네 죽음을 위한 장송곡이 되리라." 정말.. 너무.. 좋네....ㅠ
그리고 나서 급전개가 장난이 아님. 난 진짴ㅋㅋㅋㅋㅋㅋㅋ 맥더프가 맥베스를 죽일 수 있는 이유가 자연분만이 아니라 제왕절개로 태어난 인간이라 그랬다니 웃음을 참을수가 없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더프 셀프제왕절개분만 실화냐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 분량이 공기 수준이던 맥더프가 갑자기 맥베스랑 싸우고 걜 찔러죽이더니 맬컴이 등장해서 왕이 되어버린다. 합창, 음악, 가사는 기쁨에 젖어 희망을 부르짖는 와중에 뱅코우의 아들 플리언스가 무대에 자리잡고 맥더프와 맬컴의 등골을 싸하게 만들어버림ㅋㅋㅋㅋㅋ 백그라운드는 레미제라블 수준인데 무대 앞에서는 이미 차기에 흘릴 피가 예견되고 있는 것.
맥베스 처음 보는 입문용 프로덕션으로는 괜찮게 봤다. 재밌었음. 돈카를로보다 내용이 집약적이고 자체적으로 버리는 씬이 덜하다. 돈카를로는 개인적으로 카를로스랑 엘리사베타 나오는 장면은 전부 자체휴식시간인데 맥베스는 나오는 모든 캐릭터가 재밌음.
무대나 의상 비주얼도 예쁘고 잘 만들어놨다. 마녀들의 장면이 어수선하다는 평이 있는데 나는 좋았음. 잘 어울리지 않나? 음악이랑도 괜찮게 어울리는 것 같던데. 좀 발푸르기스 느낌도 나고.ㅋㅋ 난 고전보다 현대물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좀 더 호평을 준 것일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무대예술을 보러 간다."고 하면 딱 기대할 만한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전체적으론 만족. 가수들도 무난하게 잘 해 줬고. 네트렙코 팬이 아니라서 "끝내주게 잘 했다"고는 못 말하겠는데 "끝내주게 잘 어울렸다"고는 말할 수 있다.ㅋㅋ 잘하는진 모르겠어 듣기 너무 힘들단 말임...
후기는 끝이고 초점이 묘하게 나갔는데 어쨌든 섹시한 커튼콜 파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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