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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네덜란드국립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본문

오페라, 클래식

2011 네덜란드국립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허튼 2018. 11. 19. 09:28


지휘: 마리스 얀손스

연출: 슈테판 헤어하임

출연: 보 스코부스(오네긴),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타치아나), 안드레이 두나예프(렌스키), 엘레나 막시모바(올가)


본격 보 스코부스 영상화보집


  '언젠가 꼭 헤어하임의 연출을 봐야지, 그리고 그 시작은 오네긴으로 할 거야.'라고 1년 동안 생각해 왔는데 그것을 지금 이룬다... 날씨가 추워지고 마음이 쓸쓸해지기 시작하면 오네긴을 집어든다는 리추얼을 작년에 흐보옹 메트 오네긴 보고 만들었답니다. 이 프로덕션 보고 갑자기 불타올라서 헤어하임이랑 쿠세이 연출 블루레이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다보니 총액이 금방 40만원을 넘어버렸음. 아아... 연금복권....


  기대했던 헤어하임은 생각보다 점잖고 젠틀했다. 의상도 예쁘고 무대도 예쁘고 조명도 예쁘고 보 스코부스도 예쁘고.. 그러면서도 고전 원본의 시간선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그걸 한 번 뒤섞어줌으로써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묘미를 한껏 살려주는 게 확실히 존잘은 존잘이다 싶었다. 유리 온실 속의 시대배경을 고전적인 러시아, 근대 러시아, 현대 러시아로 구분해서 보여주었다가도 오네긴의 개입과 동시에 루비치의 <굴공주> 코레오그래피처럼 서로 얽혀들게 하면서 시간을 완벽하게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었다. 타치아나의 환상과 문학 속 사랑의 책에서 갑자기 공산주의 강령이 되어버린 빨간 책 소품에서부터 공산주의자가 된 렌스키는 좀 의문이긴 했는데, 불타오르는 황금별과 불곰, 러시아 정교회, 발레단, 운동선수, 우주인까지 등장한 걸로 보아 그냥 유럽맨들이 가지고 있는 러시아 이미지를 죄다 때려박았다고 편하게 보면 될 것 같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부르주아 오네긴에 반대해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시인 렌스키는 이상해..


  극은 회상 형식으로 흘러간다. 3막의 파티장에서 타치아나를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시간은 이 프로덕션의 서곡과 하나로 합쳐진다. 오네긴 한 사람만의 회상이었으면 쉬웠을텐데 타치아나의 회상까지 겹쳐진다. 회상 중첩의 정점은 타치아나의 편지 씬이다. 오네긴이 앉아서 타치아나의 편지를 대신 쓰고 있다, 정말 쉽지가 않다!! 오네긴 덕후 트친분과 메이킹 추가영상으로 저기 편지를 쓰고 앉아 있는 오네긴은 타치아나의 투사체(?)이며 이후 3막에서 대공비가 된 타치아나에게 오네긴이 보내는 편지까지도 엮일 수 있는 장면임을 알았지만 아니 이 작품 처음 보는 사람은 그걸 깨달을 수 있겠어요?ㅠㅠ 편지씬 보 스코부스 너무 잘생김..


  이 작품의 후회공적 모먼트들, 쓸쓸하고 씁쓸한 그 모든 질척대는 감정들을 표현하기에 회상보다 좋은 도구는 없을 테다. 타치아나의 시골 집에서 (트친분의 말을 빌리자면) 유령처럼 배회하는 오네긴의 표정, 어린 타치아나가 오만한 오네긴에게 보기좋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그리 감정적이지 않은 눈으로 덤덤하게 바라보는 대공비 타치아나, 결투 전에 유리 온실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는 오네긴과 렌스키(이 장면에서 유리 온실 벽은 특별한 효과를 낸다. 온실 안에 들어가 있는 렌스키의 몸에 오네긴의 얼굴이 비춰져서 마치 렌스키의 일부가 오네긴인 것처럼 보이는 효과다. 렌스키를 죽이고 나서의 오네긴은 분명히 어떤 전환점을 지난 사람이다. 돌이킬 수도 없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을 몸 안에 지니게 된 것이다.)... 이 장치들은 우리가 이전의 모든 흑역사를 다시 꺼내보며 느끼는 감정을 무대 위에 손실 없이 되살려놓는다. 내가 중1때 트위터를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초딩때 디씨에 썼던 글 누가 내 눈 앞에 저렇게 보여주면 진짜 죽고싶을 것 같음.ㅋㅋㅋㅋㅋㅋ....

  이 후회와 회한의 질척임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해버리고 만다. 수많은 한남문학에서처럼 오네긴도 대공비 타치아나와 그레민 앞에서 "나랑 같이 죽을래?! 아님 나랑 같이 살래!!!"를 시전한다. 그의 손에 쥐어진 총 속의 탄알은 이미 그레민이 전부 빼 두었기 때문에 실탄은 발사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오네긴만 모른다. 타치아나는 그레민과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고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오네긴에게 남은 건 그가 그렇게도 피하고 싶어했던 대중의 가십과 비웃음거리를 갈구하는 관심 뿐. 그는 유리 온실에 반사된 자기 자신 이미지에 총을 쏜다. 당연히 총알은 발사되지 않고 관중의 비웃음과 절망한 오네긴의 표정에서 암전. 진  짜   쪽   팔   려   죽   겠   다  !  !  ! 이 작품 안에 있는 감정들을 이렇게 잘 구현한 것은 연출의 힘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겠지. 차콥이 아무리 곡을 잘 쓰고 가수들과 오케가 아무리 연주를 잘 해 놔도 그것들을 하나로 엮어 보여주는 것은 연출의 역량일 것이다.



  아무튼 오네긴은 잘생긴 사람이 해야 한다. 진짜루.. 그게 아니면 설득력이 없음. 그리고 이 프로덕션은 보 스코부스 영상화보입니다.




  다음엔 뭘 볼까, 쿠세이의 네덜란드인과 헤어하임의 보엠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 두 사람의 루살카들도 보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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