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하임은 뮤지컬신
2016 리세우 <맥베스> 본문
지휘: 잠파올로 비잔티
연출: 크리스토프 로이
출연: 루도빅 테치에(맥베스), 마르티나 세라핀(맥베스 부인), 비탈리 코발료프(뱅쿠오)
같은 프로덕션의 다른 가수, 다른 날 공연인 듯 하다
이 프로덕션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저 무대 사진을 보고 나서다. 뱅쿠오까지 죽인 뒤 점점 미쳐가다가 결국 두 번째로 마녀들에게 찾아갔을 때 맥베스의 눈 앞에는 지난 8명의 왕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마지막 순서인 뱅쿠오는 급기야 거울을 들어 맥베스를 비추고, 맥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채 기절해버린다. 그 장면을 이 프로덕션에서는 박물관에 전시된 왕들과 이를 구경하는 관람객으로 대체하고, 뱅쿠오를 박물관 경비로 만들어 손전등으로 맥베스의 얼굴을 직접 비추게 한다. 상징적으로는 손전등보다야 원작에서의 거울이 훨씬 좋았을 테지만 어쨌든 의미는 같으니까. 어.. 그리고.. 무대가 예쁘잖아요? 그래서 봤음.. 크리스토프 로이는 이 영상물로 처음 보게 된 연출가인데 2002년 ROH에서 데뷔한 후 충실하게 많은 오페라 작품을 도맡아 온 연출가다. 그 관록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 '피에타 리스페토 아모레'에서 테치에를 연기하게 만든 그 노련함에 들어있는 것이다!
시간선이 뒤죽박죽 어려운 프로덕션은 아니다. 오버츄어가 연주되고 마녀가 등장하기 전에 레이디맥베스는 이미 몽유병자이며 맥베스는 모든 회한에 가득 차 텅 빈 무대 위 왕좌에 앉아 있다. 이후 진짜 몽유병 씬에서 드러눕게 될 자리에 레이디맥베스는 서곡부터 누워버린다. 그녀를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맥베스에서 서곡이 끝난다. 그리고 나서 무대로 돌진해 들어오는 마녀들과 함께 레이디맥베스는 무대를 떠나고 맥베스는 진짜 극 중 시간선으로 휘말려들어간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는 끔찍하게 어둡다. 그 어두운 무대를 밝히는 것은 무대 앞을 가리는 하얀 베일, 파란 조명, 식탁보, 레이디맥베스의 하얀 나이트드레스 뿐이다. 덩컨을 죽이고 들어와서 온 바닷물을 전부 다 써도 이 손에 묻은 피를 지울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을 할 때 맥베스의 손에 묻어 있는 피마저도 검은 색이다.
무대는 주로 맥베스의 저택. 마녀들이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맥베스의 저택이다. 메이킹 필름을 보니 이 저택은 히치콕 <레베카> 속 맨덜리 저택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뱅쿠오를 죽일 때에도 무대만큼은 저택 연회장인데, 여기서 뱅쿠오를 어떻게 죽이느냐? 뱅쿠오는 죽기 위해 무대에서 퇴장한다. ㅋㅋㅋㅋㅋㅋㅋ이게 뭐여ㅋㅋㅋㅋ '배신이다! 도망가라 아들아!'를 무대 밖에서 부르짖는다.
어두워서 뭣도 안 보이는 무대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수들은 모두 하얗게 동동 뜬 얼굴화장을 한다. 특정 인물들(맥베스의 하인, 뱅쿠오의 아들)은 입술에 짙은 화장을 해서 마치 흑백무성영화 시대의 뱀파이어 캐릭터를 보는 듯 하다.
사진의 저 사람은 맥베스의 하인인데, 극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를 배회하며 무게를 잡고 있다. 이 집안에 휘몰아치는 피바람을 저렇게 잘생긴 얼굴과 창백한 피부와 검은 입술로 표현하고 싶은 것인지.. 저사람은 죽음의 관념캐인 것인지... 잘생기고 피지컬이 좋으니 계속 무대 위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지!!
테치에는 여기서도 연기를 못 한다(당연하지.. 그게어디가겠음..). 테치에 본인의 해석인지 연출의 연기지시인지 모를 돌아버린 눈빛발싸!!만 수십번 해대는데, 피에타 리스페토 아모레에서만큼은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준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레이디맥베스 역의 세라핀은 고음 너무 힘들지만 무난하게 역을 맡아줬고 뱅쿠오 역의 코발료프 목소리 좋더라.. 전체적으로 다 그냥저냥 괜찮긴 한데 맥더프 정말 별로........ㅠㅠ 맥더프 잘 뽑히는 프로덕션 있긴 한건가요..?ㅠㅠ..
연출적으로 재미있었던 장면은 4막의 합창 씬이다. 보통 영화에서 억압에 고통받는 약자들 또는 결연한 반란군들(홀로코스트 영화의 수감자들이라든가 일제강점기 영화의 독립군들이라든가 등등)을 표현할 때 롱테이크나 긴 몽타주로 피억압자 개개인의 얼굴을 하나하나 잡아주는 시간을 갖지 않던가. 억압해야 하는 하나의 무리로서 자신의 개별적 특성을 상실한 채 단지 그 집단으로서만 대우되는 그런 사람들에게, 개인으로 생각될 시간을 주는 것이겠지. 그건 정말 영화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보고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으니까.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만 잡아주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그 얼굴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로 나누어서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걸 이 프로덕션에서는 무대 위에서 감행하고 있다. 어두운 무대 위에 사람들에게는 검은 옷을 입히고 얼굴은 하얗게 만들어서. 그렇게 하면 무대 위에는 정말 말 그대로 얼굴들만 동동 떠다니게 된다. 영화에서의 그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또 하필 맥베스에 의해 짓밟힌 자기 가족들을 추모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피난민들의 합창 장면에서! 신기함.
이 프로덕션이 채택한 버전은 극의 깔끔함에 한 몫을 했다. 나는 처음에 이게 연출이 자른 건 줄 알았는데, 그냥 1847년 / 1865년 버전의 차이더라.. 여기서 사용된 것은 1865년 버전이고, 마지막 국뽕 합창을 맥베스가 죽어가는 아리아(1847년판)로 대체한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국뽕 합창이 사라진 것에 나는 그만 뿅가버리고 말았다....
첫 번째 사진은 극의 초반부, 맥베스가 코더의 영주, 글래미스의 영주가 된다는 마녀들의 예언이 맞아떨어지고, 이제 왕이 될 거라는 세 번째 예언만 남은 상황에서 마녀들이 퇴장하기 직전 합창 장면. 두 번째 사진은 극의 가장 마지막 장면. 맥베스는 죽기 직전 마지막 아리아를 부른다. 그가 죽고 나자 맬컴은 왕좌에 앉으면서 합창과 함께 "맬컴이 이제 우리의 왕이다!" 한 마디를 부르짖는다. 그리고 암전!
내가 봤던 다른 프로덕션들은 맥베스가 죽고 나서 합창단이 새 왕을 찬양하고 승리를 기뻐하는 합창을 정말 오래오래 부른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아.. 그 때 거기서 끝났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 장면을 보고 찝찝하게 관람을 끝내야 했었다. 그런데 이 프로덕션은 얼마나 깔끔하게, 그렇지만 작품의 메시지는 잘 살려두면서 가위질을 했는지! 그것도 이렇게 마녀들/합창단을 사용해서 수미상관식으로! ㅠㅠ 구질구질한 국뽕 없는 엔딩에 드러누웠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맥베스 광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다리오 아르젠토 연출의 맥베스도 너무너무 보고싶은데 혹시 볼 수 있는 곳 아시는 분은 제보 바랍니다. 제보하실 때 왜구맥 아닌 킨리사이드 빈슈타츠오퍼 맥베스도 어디서 볼 수 있는지 함께 알려주시길.. 일회 관람에 최대 30유로까지 / 블루레이나 딥디에는 45유로까지 지불의사 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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