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하임은 뮤지컬신
2011 그라츠 <라 트라비아타> 본문
지휘: 테크빈 에반스
연출: 페터 콘비츠니
출연: 마를리스 페터슨(비올레타), 주세페 바라노(알프레도), 제임스 루터포드(제르몽)
커튼콜 포함 1시간 50분이라는 말도안되는 러닝타임이다. 합창 하나 쯤 잘려나가서 삭제된 부분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 지휘자가 좀 열심히 달린다. 보기 전에 영상 댓글 중 제일 웃겼던 건 "It's like they had $0 budget for staging."이었다. 보고 나니 제일 웃긴 건 웨이 투 미니멀리스트라는 댓글인데 이게 무슨 미니멀리스트야 걍 아무것도 없는거지 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는 무대가 극에 엄청난 충만을 가져왔다면 만족해야하는 거 아닐까? 이 프로덕션에 만약 배경이 온갖 실제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면 비올레타에게 이정도의 캐릭터성과 드라마를 주지 못 했을텐데.
사실 요즘 중간고사 끝나고 좀 해이해져서 공부하기 싫다고 내 전공 아닌 남의 전공 논문들을 막 읽다가 이용숙 선생님의 너무 재미있는 박사논문을 읽게 됐다. (오알못이라 논문의 학문적 가치는 잘 모릅니다!!) 제목은 '바그너 <파르지팔>의 레지테아터 연구'. 올해 초에 나온 논문이다. 내가 왜 하필이면 현대연극이 아닌 고전 오페라를 좋아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필이면 구닥다리를 파면서 쿠세이를 좋아하고 있는지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걸 말로 풀어 써두셨길래 낄낄대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 게 베네딕트 폰 페터의 <라 트라비아타> 연출이다. 하노버에서 공연된 이 프로덕션은 무대 위에 오직 비올레타 한 사람만 등장하는 것을 허락한다. 알프레도나 제르몽 등 주변 인물들은 무대에 올라오지 않고 무대 뒤에서 노래불러야 하며, 합창단의 목소리는 객석 사방에서 들려온다. 본격적으로 비올레타 역 가수를 학대하는 프로덕션!
이런 프로덕션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기까지 트라비아타에 가해진 많은 실험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페터 콘비츠니의 연출일 것이다. 넘 유명한 그것을 이제야 보게 되었다.
이 프로덕션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두 개를 꼽으라 하면 첫째로는 비올레타를 설득(협박)하러 온 제르몽 씬, 둘째로는 알프레도와의 재회 장면부터 비올레타의 죽음까지를 꼽겠다. 제르몽은 비올레타에게 자신의 두 딸의 혼삿길을 생각해서라도 알프레도와 헤어져달라고 협박하는데, 이 때 그는 자신의 10대로 보이는 딸을 비올레타 앞에 데려온다. 비올레타에게 창녀라고 윽박지를 때에도, 그녀를 무정하게 뿌리칠 때에도, 늙어 미모가 빛바래게 되면 남자들은 너를 버릴 거라고 말할 때에도 딸은 무대 위에 억지로 끌려나온다. 비올레타는 그 딸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본 것일수도, 단지 연민을 느낀 것일수도 있다. 알프레도의 동생이자 제르몽의 딸의 등장은 벼랑 끝에 몰린 비올레타의 감정을 증폭시켜 관객에게 전달하는 효과를 내 준다.
후반부에 가서는 무대 위에 붉은 장막과 나무 의자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얼마나 꽉 차게 쓰는지! 기쁨을 찾아 자유롭게 날고 싶지만 죽음 때문에 추락해야만 하는 비올레타를 거대한 그림자와 의자에서의 추락으로 표현하고, 비올레타에 대한 알프레도의 모욕 장면에서는 붉은 장막을 아예 무대에서 뜯어내버려 사람들과 뒤섞이게 만든다. 이 때 뜯어진 장막은 다시 복구되지 않고 무대 위에서 치워진다. 이후 알프레도가 비올레타에게 다시 찾아와 파리로 떠나자는 듀엣을 부를 때, 비올레타와 알프레도는 마치 그 뜯어진 자리에 아직까지도 붉은 막이 있는 것마냥 끌어당기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비올레타는 이미 생명을 잃어 앞으로는 죽음밖에 남지 않았고, 알프레도는 자신의 유치한 짓으로 인해 비올레타를 잃었지만 그것은 단지 한갓 환상이었던 것처럼, 앞으로는 행복만이 있을 것이라고 가장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관객이 모두 알고 있듯 비올레타와 알프레도도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림막을 치려는 그 행위는 더욱 더 처절하게 보이게 된다. 이는 알프레도의 품 안에 안겨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이나 영화 <판도라의 상자> 속 '룰루'를 연상시키는 가발을 벗어던지는 모습과 겹쳐져 애절함을 더한다. 이제서야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눈 앞에 죽음이 있다니.
비올레타의 죽음은 처절함의 극치다. 많은 <라 트라비아타> 연출들이 그녀의 죽음을 보여줄 때 그동안 그녀가 친분을 쌓았던 사람들- 의사, 제르몽, 알프레도, 안니나 등 -의 온기에 둘러싸여 죽도록 한다. 하지만 콘비츠니는 얼마나 냉정한가! 비올레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객석에 서서 무대를 바라본다. 무대 위에는 무너져내린 알프레도의 책더미와 의자, 객석 방향을 바라보며 자신의 사진을 건네는 비올레타가 전부다. 홀로 죽음을 맞는 비올레타와 그녀를 죽음까지 몰고간 주변인들, 그리고 그것을 관음하는 관객! 이윽고 비올레타는 객석을 등지고 무대 뒷편의 어둠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연출의 터치........ 야 좀.... 진짜 너무하지 않냐?!ㅠㅠ
무대가 비어있고 다른 캐릭터들의 임팩트가 그리 강하지 않아서 모든 초점이 비올레타에게 맞춰진다. 비올레타의 심리와 감정선, 이 세상에 홀로 떨어져버린 고립감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알프레도가 노래만 잘했다면 좀 더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 천재는 많고 볼 것도 널려 있다. 평생 봐도 다 못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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