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하임은 뮤지컬신
2018 빈 슈타츠오퍼 <예브게니 오네긴> 본문
지휘: 루이 랑그레
연출: 팔크 리히터
출연: 올가 베츠메르트나(타치아나), 알렉세이 마르코프(오네긴), 엘레나 막시모바(올가), 드미트리 코르차크(렌스키), 모니카 보히넥(라리나 부인), 봉기웨 나카니(필리프예프나), 페루초 푸를라네토(그레민 공작)
팔크 리히터가 최근 유럽에서 젤 잘나가는 독일 작가라면서요?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자기가 쓴 드라마는 연출도 손수 하는 것 같은데 마침 오페라 연출도 했길래 (오네긴이 지금까지 한 유일한 오페라 연출 작업인 듯) 영업(???) 당해서 보게 되었다.
처음 이 작가를 말로 전해들었을 때는 재밌는 조롱을 잘 할 줄 아는 작가라고 들었기 때문에 여기 <오네긴>에서는 자신의 조롱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지 궁금했다. 그런데 웬걸 이렇게 얌전하다니. 가장 최근에 본 게 칼릭스토 비에이토 <토스카>라서 비교적 얌전해보이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의심해보기도 하고, 끝까지 보면 뭔가 웃기고 깨는 게 나오겠지 하면서 다독여도 봤는데 끝까지 무대는 예쁘고 철저히 오페라 원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요즘 재밌는 연출들은 전부 서곡이 연주되는 그 순간부터, 아니면 서곡 이전부터 무대 위에서 뭔가 이야기를 진행시키거나 컨셉을 알려주던데 이 프로덕션에서는 그런 건 없다며 서곡 내내 막에 오네긴! 이름을 영사할 때부터 좀 슬펐다. 아 이게 모애요 내 기대 돌려조~!
그렇다고 연출이 구리다는 건 아니고, 완전히 전통적인 무대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무대는 대부분 비어있다. 차가운 흰색 또는 쇠 질감의 직육면체로 이루어진 구조물과 바닥, 계단이 전부다.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단지 칠흑같은 어둠, 흩날리는 눈발과 종종 소품처럼 이용되는 사람들이다.
소품처럼 이용되는 사람들! 천재 연출들은 사람을 정말 잘 이용한다. 이 프로덕션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역시 사람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1막 3장의 오네긴 거절 아리아 장면이다. 텍스트상으로 오네긴과 타치아나가 처음 만나는 1막1장과 오네긴이 타치아나의 편지를 돌려주며 마음을 거절하는 1막3장의 배경은 둘 다 (다른 장소이긴 해도) 라린 가의 정원이다. 정원이면 어쨌거나 나무가 있겠지. 연출은 정원의 나무들을 포옹하고 있는 남녀 여덟 쌍으로 형상화한다. 이런 식으로!
위 캡쳐는 1막 1장에서 오네긴과 타치아나가 처음 만날 때 장면이다. 이렇게 서로 딱 달라붙어 있던 커플들은 2장에서는 퇴장했다가 3장의 편지 거절 씬에 와서 오네긴의 아리아가 진행되는 내내 하나 하나 분리되어간다.
남자들은 퇴장하고, 여자들은 남는다. 오네긴의 거절 아리아가 끝났을 때 무대 위에는 두 커플이 남아있게 되는데, 이들마저도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감정을 자제하는 방법을 배우세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당신을 이해해주지는 않으니까요."라고 덧붙이자마자 한번에 분리된다. 이 프로덕션을 통틀어 가장 쓸쓸하고 마음아프고 잘 만들었다 싶은 장면이었다. 2D 남자만 만나다가 처음으로 책 찢고 3D로 튀어나온 최애캐를 만났는데 밤새 편지써서 고백했더니 그놈이 거절해버리는 그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사랑을 거절당해 본 적 있는 사람은 이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프로덕션에서 결투 씬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사실 <오네긴> 속 가장 이해 못 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결투 씬일 것이다. 현대 정서에 전혀 맞지도 않고, 친구한테 모욕 한 번 당했다고 총잡이질을 하다니. 그래서 체르냐코프는 아예 둘의 결투가 아니라 사냥총 오발 사건으로 결투 씬을 뒤바꿔버리지 않았던가. 팔크 리히터는 렌스키와 오네긴 두 친구의 화해무드를 조성하다가 방해하는 식으로 결투 씬을 풀어낸다. 오네긴이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렌스키가 그에 응하려는 순간에 자레츠키가 준비가 다 되었다고 결투를 시작하라고 방해하고, 서로 몇 발자국씩 멀어져 총을 쏘기 위해 뒤를 돌아야 할 때 총을 내려놓는 렌스키를 오네긴이 보지 못하고 쏴버린다. 결국 그들에게 서로를 죽이려는 의도는 희미해지고, 안타까운 죽음만 남는 셈이다. (결투 장면 전에 코르차크가 쿠다쿠다를 너무 기깔나게 잘 불러버려서 그 아리아 혼자 툭 튀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긴 했다. 혼자 빛나구 있음 ㅋㅋ)
폴로네이즈 장면에서 화려함은 없다. ROH에서는 죽은 렌스키 시체를 앞에 두고 킨리사이드가 여자들인지 여자들 유령인지에 홀려 돈조반니 짓을 했고, 헤어하임 판에서는 러시아/쏘련의 온갖 대표적 키치들이 나와서 난장 깽판을 치며 시간선을 뒤섞어놨는데, 여기에는 끔찍한 어둠과 장례 행렬같은 연미복 뿐이다. 또 다시 남녀 한쌍이 무대를 채운다. 이들 사이를 홀로 남은 오네긴이 배회한다. 1막에서 남녀 쌍이 타치아나의 무너져내리는 마음 속 이데알을 보여주었다면, 3막의 남녀쌍은 오네긴을 외면하는 고위층 사회를 보여준다. 오네긴이 외면한건지 오네긴을 외면한건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무대는 렌스키 사망 이후 빛을 잃은 듯 어둡다.
오네긴은 3막 1장이 끝나고 막이 내려간 뒤 막 앞의 남아있는 무대 공간에 등장해 타치아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이렇게 오네긴이 편지 쓰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작품 이해에는 도움이 크게 되는 것 같다. 새삼 헤어하임이 얼마나 나쁜놈인지 깨닫게 되네. 타치아나에게 거절당한 뒤 "개같은 내 인생" 부르짖는 장면도 크게 특별할 것 없이 텍스트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무대 뒤로 퇴장하는 타치아나와 그를 쫓아가다 망연자실한 등을 보이는 오네긴 위로 막이 내려가는 것으로 끝. 예쁘고 어둡고 텅 빈 무대와 준수한 가수진으로 승부를 본 건지 빈 슈타츠오퍼가 특별히 보수적이라 그런지 잘 모르겠다.
한가지 특이했던 것은 막을 너무 자주 내리고 한 번 내리면 오랫동안 내린 상태로 유지한다는 점이다. 1, 2, 3막들 뿐만 아니라 각 장들마다도 꼬박꼬박 막을 내려 무대를 바꾼다. 막 내리고 무대 바꾸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1막1장 끝나고 편지 씬도 안나왔는데 1막 끝난 줄 알았음.ㅠㅠ 그리고 막이 내려가있는 동안 오네긴의 이름 또는 타치아나가 오네긴에게 보내는 편지를 영사시켜둔다. 나는 좋은 연출은 막과 암전을 최소화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잘 모르겠다. 그리고 2막 끝나고 자체커튼콜은 왜 하는건가요 원래 이거 이 때 하는건지...?
아무튼 보다보니 재밌고 예뻐서 만족스럽긴 했다. 아주 친절한 연출이었다. 이 작가 공부하고 있는 선배가 "연극으로 자아실현하고 오페라로 예쁜 거 한다"고 했는데 넘 웃기고 맞는 말 같음ㅋㅋㅋㅋㅋ 오페라는 돈이 많으니까 그걸로 하고 싶은 예쁜 거 하느라 장면전환도 느려지고 그러는걸까.
오네긴 역의 알렉세이 마르코프 목소리가 인상에 남는다. 오네긴에 참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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