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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소마 Midsommar>, 도취와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코러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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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소마 Midsommar>, 도취와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코러스

허튼 2019. 7. 16. 14:11

 

감독: 아리 에스터

 

 

  오랜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영화를 봤다. 심야로 봐서 영화가 1시에 끝났는데, 그 흥겨움과 즐거움에 4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이게 무슨 공포영화예요, 힐링물이지.

 

  나는 요즘 코러스에 빠져 있다. 관심사가 그 쪽에만 가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쨌든 읽고 보고 쓰는 것들이 전부 코러스다. 그것도 코러스가 자연스러운 요소인 음악극(오페라나 뮤지컬 등)에서의 코러스가 아니라 연극에서의 코러스를 공부하고 있다. 봐야할 게 너무 많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근대 고전주의 드라마와 20세기 초반 새로운 영향미학, 나치미학, 20세기 중후반의 포스트드라마, 그리고 포스트드라마의 한계를 지적한 21세기 초입의 새로운 조류까지 연극에서의 코러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어 왔다. 포스트드라마가 지나간 지금의 나는 코러스를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 지 몰라 난감한 채로 멈춰 있지만 어쨌든 코러스라는 요소가 재미있는 주제라는 건 틀림이 없다.

 

  코러스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도취와 열광에서 출발하여, 고대 그리스 비극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단일한 주인공들 역시 처음에는 코러스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인물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관객과 무대 사이에서 보편성을 상징하는 집단이자 "이상적 관객"으로서 무대와 관객을 매개하고 극중 사건을 평가했다. 한편 집단의 폭력성 또는 집단적 도취로 인한 이성의 상실에 대한 경계 역시 지속적으로 논의되었기에, 실러와 브레히트는 코러스를 통해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또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개인의 인식을 촉구하는 일종의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1900년대 초 연극에서의 코러스는 공산주의적 이념을 위한 새로운 시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군중-코러스 Massenchor의 이미지를 사용했고, 나치 집권 당시에는 민족-, 국가주의적 전체성의 이념을 전파하고자 집단의 가치와 무조건적으로 일치하는 개인이라는 군중-코러스 이미지를 사용했다. 이처럼 연극에서 코러스의 사용은 집단과 개인 사이의 진동하는 긴장관계를 지속적으로 주제화하여 그 흐름을 이어왔다.

  특히 도취, 근원적 일자, 새로운 시험적 공동체 등의 키워드는 코러스 이론들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니체의 <비극의 탄생>만 봐도 알 만 하다.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소리로 같은 것을 말하며 같은 동작을 취한다. 개별의 신체들이지만 코러스가 작동하는 순간만큼은 하나의 신체로 융합된다. 무대 뿐만 아니라 객석까지도 하나가 된다. 이것은 마약과도 같은 순간이고, 공동체적 경험이다. 막스 라인하르트가 '5000명의 연극'을 통해 시도하려 했던 건 이런 공동체 실험일 것이다. 나는 아마 벤야민이 '이미지 공간 / 신체공간'과 '집단적 신경감응'이라는 단어들로 말하고자 했던 바 역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나다. 나는 이런 걸 버텨내기가 너무 힘들다. 개인이 자신의 개체성을 잃어버리고 집단과 하나가 된다? 그것도 노래와 춤을 통해서? 노래와 춤이 아니더라도, 반복되는 말과 외침, 동작들을 통해서? 정말 역겨운 일이다. 그것이 진보나 보수 어느 진영에서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물론 혁명은 그렇게 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일 테지만, 그렇다면 누군가 지옥에 내 자리를 마련해 두고서는 나 대신 혁명을 하겠죠. 거의 확실하게도 이런 태도가 나를 코러스연극이라는 주제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코러스 연극의 전통에 거리두기라는 흐름이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니까 막 지도교수님께 코러스연극으로 프로포절을 내고 무식하다고 혼나고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던 와중에 <미드소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드소마>에서는 코러스 요소의 홍수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취'의 전통에 있는 코러스가 무대 위에서 하는 역할은 다음과 같다. <미드소마>의 9일간의 제의에서 호르가 공동체의 코러스 역시 같은 역할을 취한다. 1) 노래와 움직임을 통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도취를 통해 하나의 집단적 신체를 만드는 일종의 '마약/치료약 Droge'으로서의 역할, 2) 비극의 주인공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 울음을 증폭시켜 관객에게도 전달하고, 넓게 퍼지게 하여 공공성(Öffentlichkeit)을 획득하며 결국은 카타르시스까지 이르게 하는 '공명기 共鳴器/Resonanz'로서의 역할, 3) 코러스를 통해 만들어진 집단적 신체는 극단화된 개인주의에 맞서는 '시험적 공동체'로서 처방된다. <미드소마>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정말 기막히게도 이 영화 안에 연극에서의 코러스가 갖는 굵직한 역할들이 전부 들어있다는 점이다. 집단적 식사 장면까지 완벽하게 말이다! 마약과 도취와 고통의 울림통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낸 주인공의 웃음까지, 주인공 입장에서는 얼마나 즐겁고 상쾌한 결말인가. 개인성을 상실하고 도취에 빠져 집단을 이루게 되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나 역시도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서는 너무 행복하고 신났다. 대낮의 마약과 한판 춤과 오열은 얼마나 신날까? 물론 그것이 영화 속처럼 지속되는 집단이 아니라 영화가 끝나면 빠져나올 수 있는 공동체인 경우에만 제한되지만.

 

  <미드소마> 속 스웨덴 호르가 공동체는 모든 것이 공동의 것이다. 식사도, 육아도, 취침도, 교육도 공동이며 심지어 우리에겐 가장 사적인 행위인 섹스마저도 그러하다. 코러스의 공공성을 보여주는 요소로 우선 환한 화면을 제시할 수 있겠다. 공포영화에서는 환하고 탁 트인 배경을 잘 사용하지 않는데, 수많은 서양 공포영화가 그렇듯이 한 가족의 집이나 한 개인의 영혼 등 사적인 영역을 잠식해가는 초자연적 공포가 그 주제이기 때문이다. 어둡고 캄캄해 시야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장소에서 개인의 감각기관을 살살 건드리는 공포가 지금까지 공포영화의 주요 기제였다. 하지만 <미드소마>는 넓은 들판에 위치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하지 축제인만큼, 계속해서 탁 트인 자연과 환한 햇빛을 배경으로 제공한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너무도 명확해서, 모두가 누가 무엇을 하는 지 알고 모두가 이에 반응할 수 있다. 모든 개인행동은 공적인 것이 된다. 모두는 자신이 내뱉는 말을 조심하고, 자신이 취할 행동을 조심해야만 한다. 

  개인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내면적 감정이나 고통 역시도 이 호르가 공동체에서는 공적인 것이 된다. 호르가 인생 사이클의 종착지에 선 노인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고통과 감정이 공동의 것으로 퍼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성 노인은 절벽에서 떨어져 즉사하지만, 남성 노인(와 이 사람이 비요른 안데르센이라고 ㅋㅋㅋ)은 바위에 빗맞아 즉사하지 못하고 고통에 빠진다. 신음을 뱉어내는 노인의 숨소리에 맞춰 공동체의 코러스는 함께 신음하고 고통을 느낀다. 이는 가장 마지막에 9명의 사람을 제물로 불태우는 장면에서도 똑같이 보여지는데, 불타는 사원과 그 안의 사람들의 고통과 비명에 맞추어 호르가 코러스는 비명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한다. 이처럼 가장 사적인 부분까지 공적인 무대 위로 이끌어올리는 호르가 공동체의 공공성은 공명기로서의 코러스의 역할을 보여주고, 이는 결국 주인공인 대니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굿판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대니의 카타르시스. 조울증을 앓는 동생과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대니는 마음 놓고 공적인 장소에서 울 수 없는 사람이다. 대니는 울고 싶을 때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에게 기댔는데, 그마저도 (당연히) 눈치가 보인다. (초반의 대니에게서는 정말 출구없는 우울증 맨의 답답함이 보인다. 이건 나에게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대니 남친을 백 번 이해합니다. 남친은 남의 논문주제 스틸한 것만으로 죽일놈임) 갑자기 북받쳐오를 때, 울고싶어 속이 뒤집어지고 토하고 싶을 때 대니는 폐쇄된 화장실을 찾는다. 크리스티안과 그 친구들이 스웨덴 여행 계획을 짜고 있는 아파트 화장실에서, 비행기 화장실에서, 호르가 공동체의 화장실에서 대니는 울음을 토한다. 하지만 점점 호르가 공동체에 동화되고, 마침내는 마약과 도취의 춤 경합을 통해 5월의 여왕으로 뽑히면서 대니는 감정을 공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크리스티안이 미친 노인 코러스들의 도움(?)을 받아 호르가 여자와 섹스하는 장면(이것이 공적인 섹스라는 것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을 목격한 대니는 화장실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호르가 여자들과 함께 목놓아 운다. 이들은 감정을 공유하고 그 감정을 널리널리 퍼지게 해 준다. 대니는 스웨덴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감정을 공유할 만한 적합한 공동체를 찾지 못해 우울에 빠진 사람이었다. 가족까지 잃고 남자친구는 헤어질 생각 하는 것이 역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호르가 공동체는, 조금 많이 이상하지만, 대니에게 한 가지 방법이었을 것이다. 멍청한 미국 남자놈들(남의 박사논문 주제 빼앗아가려는 천하의 조질놈 크리스티안, 백인 미국 남자놈의 전형인 마크<<얘가제일역겨움ㅋㅋㅋ, 연구윤리 안 지키는 두번째로 조질 놈 조쉬-)에겐 지옥이었을 이 사이비 마을이 대니에겐 자신이 발붙일 새로운 공동체의 제안이자 구원 그 자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어떻게 공포영화일 수 있겠나. 이건 공포영화보다는 여성 주연의 성장영화 또는 치유영화에 더 가깝다. 대니가 그 공동체 안에 영원히 잠식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공포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영화 바깥에 있는 도취 끔찍해하는 나같은 사람이나 생각할 일이지 영화 안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 아리 에스터가 의도했던 공포 역시 이런 공포였을 것이다. 영원히 비이성에 잠식되어버린 개체로서의 인간 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을 가르게 하는 부분인 듯싶다.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말 중 '정신건강 멀쩡한 사람은 초반에 웃기고 후반에 힘들어서 멘탈이 털린 채로 나오고, 정신건강 박살난 사람은 초반에 힘들고 후반에 치유받아서 좀 즐거워진 채로 나온다'는 말이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결국 멘탈 박살났던 대니는 이 이상한 공동체에서 구원받으니까. 근데 나는 지금 정신건강 완전 멀쩡한데 너무 즐겁고... 그 이유는 아마 내가 코러스를 파고 있어서가 아닐까....

 

  이 모든 내용과는 별개로 나는 아리 에스터 감독이 일본 2ch 괴담의 광신도라고 믿는다. 혹시 아니라면 그는 2ch 괴담을 만나고 나흘 밤낮을 새가며 모든 괴담을 정독할 것이다. 그의 단편영화는 근친상간을 다루고 있고, 전작 <유전>은 사이비 종교를, <미드소마>는 일본의 부락민 축제 괴담과 매우 유사하다. 2ch 괴담의 유럽 버전이라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아래는 트위터에서 미드소마라며 주운 짤인데 이거 볼 때마다 웃겨서 울고 있다.

 

  그리고 이것저것 다 말할 것 없이 교훈은 하나다. 박사논문 주제를 잘못 잡으면 죽는다. 연구윤리를 안 지켜도 죽는다. 빠른 자퇴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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