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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방주>, 과거의 지층들

허튼 2018. 2. 13. 21:27

이 포스팅은 '영화' 카테고리와 '어디가서 말하면 안 되는 것들' 카테고리에 걸쳐 있다. 정말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데, 이미 이 블로그엔 내 밑천 다 까발렸으니 정리 겸 써 두는 것.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정말 철학의 철도 모릅니다.


2015년 가을학기에는 재밌는 걸 많이 배웠다. 처음으로 독문과 복수전공을 신청해 전공수업을 들어 본 학기였고, 그 때 괴테와 실러의 연애사에 거하게 덕통사고가 났기도 했다. 그 학기에 배운 것 중 가장 재밌었던 건 포모철로 줄여 부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이라는 전공 수업이었다. 들뢰즈의 <시네마> 2권과 거기 등장하는 영화들로 진행하는 수업이었고, 이전 학기에 들었던 '문화철학'과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의 시간관을 다뤘다. 이 코레오그래피를 매개로 베르그송을 중심적으로 다뤘다면 포모철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다루며 마지막에 잠시 베르그송이 나왔던 거지만. 덕분에 아주 옛날에 나온 영화들을 몇 편 볼 수 있었고 그 중 <레오파드>와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은 심지어 좋아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이 수업의 과제물을 내기 위해 봤던 영화다. 당시 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소쿠로프 회고전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아마 포모철을 듣기 위해 봤던 영화 중 내가 좋아하게 된 탑2가 아닐까? 탑1은 키튼의 <셜록 주니어>.


러시아산 국뽕의 미학 


<러시아 방주>의 중심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박물관 안을 유영하는 주인공(시선 또는 카메라 + 음성)과 큐스틴 후작의 대화가 전부다. 그들의 대화를 곁가지로, 배경으로 수많은 화려함과 죽음 탄생 과거 역사가 펼쳐진다. 게다가 이 영화는 그 탄생부터 놀랍다. 영화의 러닝 타임과 영화 촬영 시간이 같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원 테이크라는 말이다.


아아.... 촬영맨의 고통.. 


중간중간 극단의 클로즈업으로 씬을 끊어내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원테이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버드맨>에서 눈속임으로 원테이크인 척 끊어버리던 것과는 다르다!

이 영화에서 원테이크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버드맨>은 연극에 대한 일종의 존경의 표시로 롱테이크를 채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러시아 방주>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러시아 방주>에서 원테이크는 좀 더 영화 자체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베르그송의 시간관은 원뿔 도식으로 설명된다. "젖 먹던 힘까지"라는 관용어는 좋은 예시다. 베르그송의 시간에서 과거는 더 이상 선형상의, 지나가 버린, 사라져 버린, 그리워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과거는 정말로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이미 거기 있었다'. 과거의 지층들은 이완되기도, 응축되기도 한다. 가장 집약적으로 응축된 점에서 과거는 물질의 면을 만난다. 가장 응축된 과거 - 원뿔의 꼭지점이 면을 만났을 때 이것은 현재의 점이 된다. 점은, 과거 전부를 동원하여 물질의 면, 현실의 문제들을 뚫고 나가고자 한다.



 

서양의 선형적 시간관이 끊임없이 과거를 향한 일종의 우울, 멜랑콜리를 만들어 낸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전환이다. 현재에만 특권을 부여했다는 과실로, 역시 현재형으로 여겨졌던 '존재'마저도 베르그송의 시간관에서는 과거의 기억 전체가 된다.


<러시아 방주> 속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영화 제목 그대로 '방주', 순수 과거를 한가득 품고 있는 거대한 배와 같다. 배경은 18세기부터 21세기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시대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에르미타쥬 박물관 안에서 카메라에 담기는 예술 작품들은 그렇다면 전부 러시아 국적을 가진, 러시아의 작품들인가? 아니다.  카메라에 담기는 유럽의 예술작품들은 러시아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자체로 과거의 집합인 셈이다.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커다란 대륙 러시아는 영화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유럽적인 것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역시 영화에 따르면 그 침략 속에서 러시아적인 것은 러시아의 예술 속에서 '끊임없이' 그 맥을 이어왔다. 아아! 국뽕이여! 자국 예술에 대한 주체못할 뽕이여! 때문에 이 영화에서 원테이크는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하나의 장소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구별되지 않고' 한 점에 모여 있음을, 그 장소는 현재의 문제를 뚫고 갈 수 있는 정서를 담고 있음을, 예술 속에서 러시아적인 것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카메라의 시선인 '나'는 과거들과 현재 속 즉 에르미타쥬 박물관을 소요하며 그 안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과 사람들을 관찰한다. 프랑스인인 큐스틴 후작의 말상대가 되어주는 게 그의 주요 역할이다. 큐스틴 후작은 마치 노망난 사람같다. 그는 러시아 예술 속에 녹아들어있던 유럽적인 것의 의인화라 생각되었다. 특히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앞에서 한동안 발을 콩콩 찧으며 서있던 큐스틴 후작의 이미지는 강렬했다. 


이제 가시죠.

- 어디로 갈 지 모르겠어.

- 앞으로 가야죠. 앞으로. 앞으로.

- 난 가지 않을거야. 난 여기 남겠어.

...

- 안녕히, 유럽.


90분 동안 단 한번도 끊이지 않고 후작의 뒤를 좇던 카메라의 시선은 마지막 무도회가 끝나고 후작과 작별한다. 목소리는 안녕히, 유럽.”이라며 작별을 고하고 무도회에서 빠져나오는 수많은 군중 사이로 긴 계단을 지나 에르미타쥬 밖으로 향한다. 누군가를 따르지 않고 처음으로 혼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주 밖을 바라보며 영원히 존재할 것을 선언한다.


눈에 밟히는 이미지들의 향연인 영화. 황홀하게 아름다워서 보고 나면 극동아시아인조차 러시아 국뽕에 차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보고 난 직후에는 엄청나게 영업하러 다녔는데 영화관에서의 체험이 꽤나 좋았어서 아직까지도 좋은 감정이 있다. <프랑코포니아>는 개인적으로 <러시아 방주>보다 훨씬 노잼이었지만, <러시아 방주>때문에 <프랑코포니아>도 점수 잘 준듯. 왓챠 별점 내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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