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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웬수 - 책 <게임 코러스>를 읽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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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웬수 - 책 <게임 코러스>를 읽고

허튼 2026. 5. 27. 02:41

 
 
게임 비평에 사용된 연극 개념이 아쉽다고 불평하는 건 정당할까? 글쎄...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하고 속으로만 궁시렁대는 건 정당할까? 이건 확실히 아님. 어쨌든 모든 글은 반응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니까... 그런 마음으로 이 포스팅을 쓴다.
<게임 코러스> 얘기 조금, 니체 욕하는 얘기 많이, 코러스 얘기는 더 많이, 최대한 횡설수설 안 하려고 노력함 .......
 
 

영이, <게임 코러스>, 워크룸 프레스 2025
https://workroompress.kr/product/218241/

 
 

<게임 코러스>의 주요 논지와 개인적 불만


  <게임 코러스>는 게임 UI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는 데서 출발한다: 고대 비극의 코러스가 관객과 무대 사이에 위치하는 것처럼, UI는 게임플레이와 플레이어 사이에서 둘을 매개한다. 코러스가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 속 세계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처럼, UI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허구에의 몰입은 니체의 디오니소스-아폴론 도식을 적극적으로 빌려 온 <게임 코러스>의 논리 속에서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동의어가 된다: "결국 연극에서의 디오니소스적 몰입 장치인 코러스가 아폴론적 환영 장치인 무대 위의 세계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상태"를 객관화하여 드러내는 것과 같이, 게임에서는 UI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플레이라는 아폴론적 가상 속에서 자아를 버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근원과 합일을 이루어 도취에 빠지도록 만든다"(24쪽).
  이후 <게임 코러스>는 몰입 장치로서의 UI가 어떻게 플레이어를 게임 속으로 몰입시키느냐를 해명하기보다는, 그 반례를 드는 데 집중한다. 2장 '배신하는 UI들'에서는 게임 속 세계를 깨고 나와 현실로 밀려들어오는 UI 활용 사례를, 3장 'UI의 실패 조건'에서는 플레이어의 몰입을 처음부터 방해하는 UI디자인의 실패 사례를 분석한다. 각 챕터에서 다루어지는 예는 게임 '언더테일'에 대한 열정적인 선호나 여러 게임들에서 채택하는 '탐색 기능'에 대한 비선호, 여러 게임들의 UI 디자인에 대한 취향에 근거한 평가 등 글쓴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호오에 따른다.
 
  특히 이 책의 메인 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배신하는 UI들'에서 글쓴이는 코러스도, 게임 UI도 얼마든지 관객이나 플레이어를 배신하고 디오니소스적 몰입을 깰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 '언더테일'을 길게 분석한다. '언더테일'은 게임 속 내레이션이 플레이어를 직접 지목하면서 이것이 허구적 세계이자 게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보통 플레이어의 권한이었던 게임 종료, 데이터 세이브 / 로드를 시스템적으로 강제하거나 컴퓨터 내에서 게임 이름을 바꾸기도 하며 실재적 현실로 계속해서 빠져나온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이렇게 현실로 빠져나온 게임 속 세계가 오히려 현실을 압도해버린다는 데 있다. 이를 두고 챕터의 마지막에서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게임 속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게 만든 디오니소스적 몰입 장치, 코러스, UI가 파괴될 때 플레이어는 오히려 게임 속 세계가 경험적 현실로 밀려 나옴을 경험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플레이어는 경험적 현실이 디오니소스적 현실 앞에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리는 것을 목격한다." 당연하게도 바로 다음 문단에서 이 '파괴된' UI 역시 다시금 UI 개념 안에 포섭되며, 이러한 "배반하는 UI는 플레이어를 경험적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수단""이라고 평가된다(61쪽).
 
 
  코러스와 게임 UI의 이런 유비 자체는 설득력이 없지 않다. 고대 비극(뿐 아니라 중세에도, 바로크에도)에서 코러스는 극 중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어야 할 지 기본적인 구도와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코러스는 분명 '사용자 매개면'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역사가 있다.
  불만스러운 점은, 코러스라는, 서구 연극사에서 가장 오래된 표현수단에 접근하기 위해 이 책이 경유하는 유일한 길이 니체라는 것이다. 니체라는 웬수가 코러스에 대한 모든 글을 점령해버린 게 비단 이 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건 내게 너무 큰 불만을 준다. 니체에만 기대면서 <게임 코러스>의 재미있는 유비 아이디어가 아쉬움을 남기게 됐으니까! 니체의 디오니소스-아폴론 이분법 속에서 코러스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리 불가능하게 들러붙어버리는 데서 발생한 아쉬움이다.
  물론, 이 책에서 코러스만큼 중요한 게 고통과 고통의 긍정이라는 것도 안다. 그 다른 한 축 때문에라도 니체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코러스는 진짜 니체 말고도 다른 얘기를 엄청 많이 할 수 있는데 아쉬운 걸 어떡하나요.

 
  이 책은 코러스의 주된 기능을 몰입과 도취에 국한시키고, 몰입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은 예외적인 특수 사례로 취급한다. 플레이어가 게임 속 허구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게임 UI 코러스의 기본적 역할이며, 이 글이 '배신'이나 '실패'로 칭하는 UI들은 기본 규격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하지만 코러스는 허구적 세계를 실재로 믿고 등장인물로서 행동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 허구로부터 벗어나 관객에게 경험적 세계를 직접 지목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니체가 코러스에 대해 뭘 아는데...


  '코러스의 야누스적 성격', 고전문헌학자 베른하르트 침머만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에 이런 타이틀을 붙였다. 앞뒤가 다른 야누스의 얼굴처럼 코러스는 한 작품 안에서, 심지어 한 장면 안에서도 서로 상반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고대 비극의 코러스는 연극 속 허구의 세계에 편입되어 희곡의 등장인물로서 행위하다가도, 어느 순간 희곡의 차원을 벗어나서 당대의 관중과 사회를 직접 지목하며 시대적-사회적 맥락을 끌고 들어온다. 허구적 세계를 구현해 내는 데 기여하는 드라마적 성격과, 허구적 세계를 깨고 실제의 세계를 개입시키는 합창서정적 성격이 코러스라는 하나의 표현수단 안에 공존한다. 후자가 왜 '서정적'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합창서정 문화를 다루어야 하지만, 긴 얘기를 다음과 같이 짧게 줄여볼 수 있겠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공동체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서정시 합창 공연을 했다. 성인식, 결혼식, 승전 축하연, 전사자 예우 등의 행사를 위해 서정시가 작사/작곡되었고 합창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각종 축제에서는 그 축제를 주관한다는 신들에 대한 찬가 합창경연이 이루어졌다. 이 합창서정들은 고대 아테네인의 세계관, 역사관, 사회관을 반영하고 또 재교육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합창서정에 드라마적 성격이 추가되었던 것이 비극의 시작이며, 비극이 발전해감에 따라 합창서정적 성격이 흔적기관처럼 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허구적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의 더 넓은 맥락을 지목하는 성격을 고대 그리스라는 맥락에서 떼어놓고 순전히 기능적으로만 보았을 때에는 '서사적 성격'이라 이름붙이기도 한다. 이 경우 문학적 장르로서 서사가 -- 허구적 세계를 직접 구현하는 드라마와는 달리 --  서술자의 간접적, 매개적 서술로 수용자에게 전달된다는 점에 착안한다. 서술자로 인한 간접성과 매개성으로 허구적 세계와 수용자 사이에 빈틈이 생기며, 연극에서는 코러스가 이러한 빈틈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아무튼, 코러스는 애초부터 연극의 허구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지목하고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연극적 수단이었다.

 
  여기에 니체가 끼어드는 순간 혼란스러워진다. <비극의 탄생>의 핵심은 니체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실제 비극의 문헌학적, 연극학적 사실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는데, 이런 책을 현대 게임이라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논의로 끌어오려다 보면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선 <비극의 탄생>의 골자를 살펴보자. 현상세계의 배후에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근원적 일자가 존재한다. 이 근원적 일자는 현상세계에서는 개별화하는 아폴론적 원리로 인해 갈기갈기 쪼개진다. 그것이 현상세계의 각 존재자들이다. 찢어지고 분열된 존재로서 우리는 현상세계 안에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아폴론적 원리의 대항으로서 근원적 일자로 다시 돌아가려는 디오니소스적 원리 또한 존재하며, 이는 아폴론적 개별화 원리를 뚫고 계속해서 분출된다. 예컨대 비극이라는 장르가 발전하기 전, 원시 디오니소스 컬트에서 등장하는 사튀로스 코러스는 성적 방종과 과잉, 도취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현상세계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본다면 아폴론적 원리나 디오니소스적 원리 중 하나가 우세한데, 비극은 처음으로 이 둘이 조화되었던 장르이다. 원래 사튀로스 코러스에 우세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아폴론적 가상을 덧씌워 발전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의 불명료한 서술이 함정을 판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무엇인지 일관된 정의가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 니체가 말하는 비극이 정확히 무엇을 칭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니체는 비극이 고대인들로 하여금 현상세계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했던 위대한 예술이라고 썼지만, 이때의 비극은 도대체 어느 시기를 일컫는가? <비극의 탄생>에 분명히 적혀 있듯, 니체는 고대 비극이 적어도 소포클레스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보았고, 에우리피데스 때에는 아예 죽었다고 보았다. 코러스의 디오니소스적 본질 또한 소포클레스 때에는 이미 파괴되었다고 쓴다.[각주:1] 그러니 니체가 '진정한 디오니소스적 비극' 속 '사튀로스 코러스'의 '디오니소스적인 것'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속 코러스로 제한되거나, 우리가(또한 니체도!) 알지 못하는, 이미 오래 전 소실되어버린 그 이전의 비극 속 코러스를 칭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니체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아 코러스에 관해 논하는 글들은 매우 빈번하게 니체의 이 불분명한 서술의 함정에 자발적으로 빠져든다. 그리고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 속 코러스 전반에 강한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에너지를 덧씌우려 한다. 하지만 아예 디오니소스 컬트를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 여신도들>을 제외하고, 도대체 어느 비극의 코러스가 그렇게까지 무아지경의 도취에 시종일관 빠져있단 말인가? 유일하게 니체의 혹평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들에서조차도 코러스는 방종과 과잉, 도취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욱이, 많은 글들이 코러스 쪽에 있는 도취의 에너지를 관객에게로 옮겨와 이를 비극 속 사건에의 몰입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도취'라는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별화 원리의 파괴와 근원적 일자로의 합일일 따름으로,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구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허구에의 몰입이라는 것은 관객과 등장인물의 동일시라든가, 연민과 공포, 감정적 공감, 자연주의적 표현방식 같은 연극의 드라마투르기적 기술과 관련이 있지, 니체의 형이상학에 이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관객이 코러스에게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니체의 진술은 인물에의 동일시라기보다는 현상세계의 인간으로서, 일자라는 자신의 근원을 발견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때 객석과 무대가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관객이 무대 위 사건에 동화된다는 말이 아니라, 코러스로 표현되는 일자에 동화된다는 말일 것이다.

  <게임 코러스> 역시 코러스로서 게임 UI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나'를 잊고 도취 상태에 들어가 게임 속 세계로 빠져들도록 한다는 전제를 세움으로써 니체의 함정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러나 개념을 모호하게 뭉개버릴 위험, 니체 자체를 오독할 위험, 니체에 갇혀 실제 활용된 코러스의 다양한 모습들을 제한적으로 분석하게 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체를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앞서 소개한 '코러스의 야누스적 성격'만 가지고도 <게임 코러스>의 주장을 무리 없이 전개할 수 있다: 애초부터 허구적 세계 안과 밖을 오갈 수 있는 코러스가 관객을 극 중 상황에 몰입하도록 유도하거나(드라마적 성격) 거리를 두도록 허구적 세계를 깨트리는 것처럼(합창서정적 성격), 게임 UI도 게임 속 세계를 닫힌 시공간으로 보호하거나 플레이어의 실재적 현실 속으로 침입시킬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서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다. 단지 <게임 코러스>가 원래 UI의 '배신'이나 '실패'라고 규정한 것이 진정 배신과 실패가 아니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전혀 흠결이 아니다! 실제로 저자도 코러스와 UI가 일관성과 신뢰를 약속한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 게임 UI 코러스가 플레이어를 위한 몰입 장치라고 설정한 바로 직전의 전제를 번복하면서까지 말이다.
 

니체의 대안은 많다

 
  니체를 코러스에 대한 유일한 이론적 기반으로 두는 것이 불만이라면, 어떤 다른 옵션들이 있을까? 사실 코러스라는 개념을 도구 삼아 게임 UI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이 책의 기획에 더욱 흥미로울 법한 담론은 최근 독일어권 코러스 연구들 사이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환경으로서의 코러스'이다. [각주:2] 이 담론에서 코러스는 주체를 주체로서 구성하는 환경적 조건으로 해석된다. 코러스는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거기에 존재'하며, 주인공의 등장을 위한 시공간적 배경과 맥락을 제공해준다는 착안에서 출발한 담론이다. 이 해석은 여기서 다소 추상화되어, 현재는 어떤 주체가 하나의 결정으로 돌출하도록 예비하는 다형질적 시공간 직조물을 모두 코러스로 여기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는 푸코의 규율 권력과는 조금 달라서 주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예속하지는 않는다. 단지 주체가 출현할 수많은 조건들을 담지하는 힘의 장을 보여줄 뿐이다.[각주:3]
  이러한 해석에서 코러스는 기존의 논의들에서와 같이 반드시 구체적인 신체를 가진 어떤 집단일 필요가 없다. 연극의 시노그래피나 서정시의 자연묘사, 영화의 풍경, 심지어 플라톤 대화편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매미 울음소리도 이들에게는 코러스로 해석될 수 있다. 이보다 더 게임 UI에 어울리는 설명이 있을까? 환경적 코러스로서 게임 UI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실행하기 전부터 이미 거기에 존재하며, 플레이어를 게임 속 세계에 접근 가능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플레이어' 주체로 등장할 수 있도록 한다. 게임 UI는 게임 플레이어의 주체화 조건으로서 게임에 필수불가결하지만, 플레이 방식의 다양성을 완전히 강제하지는 않는다. 주체로서 플레이어는 게임 UI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거나 그것을 거절하고 창발적 플레이를 즐기며 유희할 수 있다. 이 담론을 채택한다면 니체와 도취로부터 벗어나 UI 코러스에 대한 보다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해진다. 실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어땠는지 문헌학적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비극의 탄생>을 불필요하게 형이하학으로 끌어내리지 않아도 된다.[각주:4]
 
 
  참, 유희! 유희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고 싶다. 이 단락을 덧붙임으로써 이 글이 훨씬 진부해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유희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인용구를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말의 완전한 뜻에서 인간인 경우에만 유희하고, 유희하는 경우에만 완전한 인간이다." 예술의 무목적성이나 놀이에 관한 얘기를 할 때면 언제나 인용되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할 때 쉴러는 오락의 차원보다는 인간 본성의 이분법적 성질에 더 집중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 감각적 욕구와 도덕적, 이성적 요구가 있고, 평소에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고 그 사람의 상태를 규정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는 일시적으로 두 본성이 동시에 활발하게 작용한다. 쉴러는 인간 본성이 어느 한 쪽으로 규정되지 않고 온전히 활동하는 이 상태를 유희라고 칭한다.
  쉴러는 이 기획을 자신의 마지막 비극까지 끌고 간다. 예술 작품으로서 비극의 관객을 유희 상태로 올려놓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들을 시도해보다가, 그는 자신의 마지막 완성작 <메시나의 신부>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코러스를 활용한다. 코러스는 집단적 노래와 춤으로 관객의 감각을 압도하면서도 동시에 극 중 상황을 뛰어넘는 성찰로 비극의 격정에 찬물을 끼얹고 이성을 활용하도록 해준다는 생각에서였다. 비극이라는 장르는 본래 경악스럽고 고통스러운 사건을 관객의 눈 앞에 그대로 구현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허구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감각적 자극이 이성적 성찰을 압도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코러스라는 "살아있는 성벽"을 세움으로써 격정을 잠시 중단하고 성찰의 차원을 지켜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살아있는 성벽"이라는 쉴러의 말을 니체는 <비극의 탄생> 7장에서 그대로 인용한다. 그리고 <게임 코러스>는 니체의 인용을 재인용하며 -- 쉴러의 맥락과는 다소 맞지 않게 -- 이를 제4의 벽과 동의어로 여기고 무대 위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현실적 세계로부터 갈라놓고 보호하는 기능이라고 해석한다(61쪽). 그러나 쉴러에게 "살아있는 성벽"으로서 코러스는 오히려 제4의 벽을 깨트리는(원래 맥락에서는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에 대적하는) 수단이었다. 코러스의 개입을 통해 연극의 허구적 세계를 더 넓은 역사적-철학적 맥락과 연결시키면서, 비극의 격정과 고통을 아주 잠시 중단시키고 그 고통을 이성의 법칙에 따른 일종의 쾌로 느낄 방법을 고안했던 것이다. 물론 이때 쉴러는 비극이 관객의 현실에 진지하고 실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비극의 시문학적 세계는 현실이 아닌 이상적-관념적 세계로 남는다. <게임 코러스>가 게임의 의의를 실재와 허구 사이 경계에서의 유희, 허구가 실재에 틈입함으로써 두 세계에서의 고통이 뒤섞이는 것, UI의 강제를 따라 게임 속 세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로부터 역설적으로 어떤 통제감과 쾌를 느끼는 것에서 찾는다면, 쉴러는 좋은 이론적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그것을 딛고 출발하든, 비판하며 부수고 출발하든 간에 말이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코러스에 대해 논할 때 니체는 이제 충분하다! 코러스에 대한 해석을 오직 니체에게만 외주 맡김으로써 많은 글들이 코러스를 단순 무아지경의 도취 집단으로 제한했으며, 코러스가 관객으로 하여금 관객으로서의 자각을 잃고 무대 위의 사건에 빠져들도록 만든다는 오해를 발생시켰다. 정작 니체는 고대 아테네 비극 속 코러스에 대해서도 그다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니체 당대에 코러스가 어떻게 형이상학에 편입되었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게임 코러스>를 계기로 썼지만, 사실 오랫동안 묵은 WONHAHN이라 이렇게 길게 늘였다. 게임 UI를 코러스로 본 이 유비 아이디어가 오직 니체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게임이 디오니소스적 고통을 긍정하고 쾌와 유희로 바꾼다는 책 말미의 열띤 호소가 글쓴이에게 너무도 중요한 주제라 니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데려간 것도 이해가 되지만... 적어도 몇 꼭지 정도는 다른 코러스를 다루었더라면...!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게임 비평에 연극 개념을 제한적으로 썼다고 궁시렁대는 건 그다지 정당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코러스는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정말 매력적인 표현수단이다! 니체 따위의 틀에 갇힐 체급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 모두가 니체라는 웬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니체가 끼친 해악이 크다.
 
 
 
 

  1. 이에 대해서는 특히 <비극의 탄생> 14장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2. 독일어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이지만, 접근성을 위해 한 다학제간 앤솔로지에 수록된 영문 서문을 첨부한다. Evelyn Annuß, Fatima Naqvi & Sebastian Kirsch (2023) Introduction, The Germanic Review: Literature, Culture, Theory, 98:2, 137-142, DOI: 10.1080/00168890.2023.2201669 [본문으로]
  3. 니체의 코러스 해석도 이 담론 안에 아주 잘 흡수된다. 근원적 일자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환경적 조건으로서 코러스이며 그로부터 아폴론적 원리로 인해 개체들이 등장한다는 내러티브가 재구성된다. [본문으로]
  4. 물론 이 담론 자체에 대해서 나는 도대체 코러스 개념을 어디까지 확장시킬 거냐고 불평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연극학 내부에나 할 소리고, 코러스라는 부담스러운 개념이 게임 비평에 도움이 된다면 갖다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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