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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천착한다는 것

허튼 2020. 12. 26. 14:55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천착'이라는 단어에 묘하게 부정적인 뜻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다른 한자지만) '천'자가 주는 어감 때문이었는지, 천착이라는 단어 자체가 안 되는 것에 억지로 붙어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사용하기 묘하게 꺼려지는 단어였다.

 

  그런데 요즘은 그 천착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너무도 울리는 거다. 이럴 일인가? 싶을 정도로 과하게...

 

  계기는 석사논문 중간발표였다. 아~ 허튼이 드디어 석사논문 중간발표를 했거든요 ㅠ !! 예년과 달리 이번 중간발표는 학교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학술대회에서 진행하게 됐고, 나는 첫빠따로 발표를 했다. 과 전임교수님들만 모아놓고 피드백 받던 이전 방식과는 달리 이번엔 타교에서 토론자 선생님도 모시게(?) 됐고, 나 말고도 박사 선생님들과 교수님들의 발표가 네 편이나 더 있는 행사였다. 아무튼 여러 모로 기존 석사과정 중간발표와는 다른 형태였고, 그래서 뒤지게 긴장빨았음.

  그런데 이 토론자 선생님이.. 논평으로 "논문 저자의 (논문주제)라는 중심 모티프에 대한 천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발표문"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임. 아니.. 아니 저도 알아요. 이게 그.. 추천서 써달라구 하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문구에 이름만 갈아끼우는 그런 말이라는 거 안다구요... 저 뒤로 엄청나게 세세한 부분까지 많이 지적받기도 했음. 하지만..... 하지만....... 여기에 어쩜 그렇게 마음이 술렁술렁하던지. 한 술 더 떠 학술대회 사회자였던 지도교수님도 "발표자 선생님들 각자가 천착해오신 분야에 대한 진정성을 볼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는 행사 마무리 멘트를 시전하셔서 진짜 울 뻔. 물론 학위도 없는 개찐따 허튼이 어떻게 감히 수십년간 당신들의 분야를 파 오신 저 "발표자 선생님들" 안에 포함되겠느냐마는.. 내 멋대로 나를 저 안에 끼워넣고 감동받았다. 어쨌든 나도 이 주제를 대학원 들어오기 전 2018년부터 파 왔다고!(ㅋㅋㅋㅋㅋ)

 

  많은 사람들에게 힘들었던 한 해였지만, 특히 나에게는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나? 내가 대체 뭘 공부하고 있는거지? 내가 공부를 왜 하고 있고, 무슨 문제의식이 있어서 이 주제를 붙들고 놓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내 공부에 대체 방향이란 게 있는 건가? 등등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던 한 해였다. 졸업논문 주제를 반 년 넘게 정하지 못했고, 많은 개요들이 기각됐고, 생각은 혼잡하고, 대체 뭘 쓰고싶은지, 뭘 하고싶은지 정리되지도 않은 채 울기만 했었다. (진짜 울진 못했다. 눈물은 안 나고 걍 명치만 꽉막혀있었다.ㅋㅋ) 실러만 공부하려던 내가 브레히트까지 공부하게 되었던 한 해고, 브레히트에 멈춰 더 이상 현대로 오지 않으려고 극구 거부하던 내가 결국 2000년대 초반 작가들까지 파고들게 되었던 한 해다. 지도교수님의 도움과 함께 극적으로 논문 개요를 정리해서 쓰기 시작한 지 이제 한달 반이고, 여전히 많은 부분들이 미지수로 남아 있다. 이런 상태에서 나 말고 다른 (권위있는?) 사람들에게서 "네가 어떤 한 분야에 천착하고 있구나" 하는 말을 들었으니, 올 한 해가 말 한 마디로 보상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분 진짜 누구세요. 연락 좀. 

 

  문제의식과 방향성. 나는 내 문제의식과 내 방향이 뭔지 모르겠다. 어렴풋하고 모호하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지하고는 있겠지만, 그걸 명확한 문장으로 말하지는 못하겠다. 오랫동안 그랬고, 여전히 그렇다. 사실 없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도 계속 품고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내 글에서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발견해준다면, 나는 분명히 실체 있는 어떤 것에 천착하고 있고, 어떤 문제 주변을 배회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겠지. 타인의 눈들을 마냥 믿어보고싶다.

 

  밖은 어수선하고 많은 일들을 미뤄놨지만, 내면적으로는 꽤나 평화롭다. 건강하고 꾸준하게 이대로만 하면 잘 마무리지을 수 있겠지. 이 블로그를 봐주시는 몇 안되는 분들도 따뜻한 연말을 보내시길 바라요. 내년에도 이 글처럼 중구난방인 블로그를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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