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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바이마르 여행: 괴테, 실러 그리고 부헨발트 수용소

허튼 2018. 8. 23. 18:29

 

  독일에서 돌아온 지 6개월이 넘은 지금 시점에도 아직 지난 2017년에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지 못했다. 2월 23일 한국에 입국한 뒤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쉴 시간 없이 개강, 과제, 시험, 대외활동과 아르바이트, 졸업논문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솔직히 힘들었다, 지금도 힘들고.

  블로그에 애드센스 광고를 달았다. '파워블로거가 돼서 꼭 불로소득을 얻어야지. 불로소득으로 통학 왕복 2시간 반 생활을 청산하고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할거야.'라는 농담 80% 진담 20%의 마음으로 말이다.ㅋㅋㅋㅋ 파워블로거가 되려면 지금같은 괴테 쉴러 따위의 키워드로는 택도 없다. 2017년의 사진들도 정리할 겸, 파워블로거가 될 창창한 앞날을 위해 기초를 다질 겸 여행기를 써보려고 한다. 정보 위주의 글이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이미 파워블로거의 길은 글른 것 같지만!!! ㅋㅋ ㅋ ㅋ ㅋ

 

  이미 몇 개월이 훌쩍 지나버린 여행들이기 때문에 여행을 하며 들었던 생각들을 좀 더 잘 정제해서 쓸 수 있을거라 기대해본다. 독일에 도착해서 처음 떠났던 여행은 독일 중부에 있는 바이마르라는 작은 도시였다.

 

 

 

  교환학생으로 머무르던 튀빙겐에서 바이마르까지는 Flixbus를 타고 10시간 남짓. 한 번 갈아타야 한다. 멀고 지치는 길이었지만 괴테실러 덕후로서 독일에 왔으면 바이마르를 가장 먼저 가야 하지 않겠나. 2017년 4월 13일부터 2017년 4월 15일까지의 여행이었다.

 

 

1. 괴테와 실러의 도시

  모두가 생각하듯 이 이유때문에 선택한 도시가 맞다. 괴테와 실러가 약 10년간 우정을 다졌던 도시. 그에 걸맞게 이 도시 곳곳에는 괴테와 실러의 흔적들이 있다. 바이마르 궁정극장 앞 괴테실러 동상은 남의 나라 위인들에게서도 국뽕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사실 난 쉴러 피규어와 함께 저 사진 찍으러 독일 간 것 맞음.......

 월계관을 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서서 쉴러의 어깨 위에 살짝 손을 올리고 있는 괴테, 45도 위를 바라보고 금방이라도 떨쳐일어날것만 같이 서있는 쉴러. 쉴러는 하지만 괴테가 들고 있는 월계관을 그러쥐지는 못한다. 토니오 크뢰거가 딜레탕트를 눈꼴시려하며 보위했던 바로 그 문학의 월계관을 괴테는 마치 "늦게 태어난 그리스인"처럼 당연하게 획득했지만, 쉴러는 평생을 고통 속에 고뇌하며 손에 닿을락말락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괴테는 오랫동안 바이마르 국립극장의 극장장을 역임했다. 괴테가 극장장이었을 때, 작센-바이마르-아이젠나흐의 대공이었던 카를 아우구스트의 야박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국립극장의 재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래퍼토리를 꾸리는 괴테의 안목은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것 같다. 괴테 자신은 궁정 고문 업무나 극장장 업무에 치여 창작의 불꽃이 완전히 꺼졌다며 슬퍼했지만 말이다. 문학 작품을 쓰거나 자신이 관심있었던 광학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고 싶었던 괴테는, 쉴러의 동의 없이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차기 극장장으로 쉴러를 추천했다. 하지만 쉴러가 과거 뷔르템베르크의 대공 카를 오이겐을 배신하고 탈영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은 괴테의 사임 요청이 탐탁치 않았거니와, 쉴러를 천거한 것 역시도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노하며 반려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극장장 직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쉴러는 그 이후로 괴테의 극장장 업무를 분담하며 바이마르 국립극장의 운영을 도왔다. 행정업무는 괴테가, 각색이나 연출, 연습 등의 실무는 쉴러가 맡는 식으로 말이다.

 

 

  도심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걸어 나오면 일름 공원(Park an der Ilm)에 도착할 수 있다. 오래된 큰 나무들 아래로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 보면 저 멀리 하얗고 고즈넉한 괴테의 정원집(Gartenhaus)과 만나게 된다. 위 사진에서 뒷편에 보이는 작은 집이 바로 그것이다. 괴테는 조용히 집필에 집중하고 싶은 날이나, 손님들과 궁정 업무로 시끄러운 자신의 대저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날이면 정원집으로 와 사색을 즐겼다. 졸졸 흐르는 작은 개울, 탁 트인 잔디밭, 높게 솟아올라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 산, 새, 맑은 공기, 하늘... 어떤 것들은 아름답고, 어떤 것들은 숭고한 자연을 만끽하며 괴테와 실러는 편지를 주고받았을 테다. 이런 곳에 살면서 글을 쓰면 괴테같은 글이 나오는 걸까? 역시 예술가에겐 매 월 1천만원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실러의 작업실 집필 책상

 

  다시 도심으로 돌아와 Schillerstraße 12번으로 가면 노란색 외벽의 조촐한 집이 한 채 있다. 쉴러가 바이마르에 자택을 마련하고 나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던 집이다. 조촐하다고는 썼지만 어디까지나 괴테의 대저택에 비교했을 때 그런 것이고, 1796년~1805년 당대에는 제법 큰 집이었다. 바이마르에서 실러는 튀빙엔의 코타 출판사와의 계약으로 연간 약 1500탈러를 벌었고 그 돈으로 빠듯하게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새벽까지 글을 쓰고 오전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했던 쉴러는 코담배와 썩은 사과를 각성제 삼아 작가 일을 했다. 몸이 아플 때에는 의뢰를 받아 각색이나 번역 작업을 주로 해치웠다가 건강이 나아지면 드라마 작품들을 썼다.

  바로 저 책상에서 쉴러 말년의 비극들이 탄생했고, 바로 저 방에서 쉴러는 죽음을 맞았다. 방의 벽지는 쉴러 본인이 자신의 미감으로 직접 골랐다고 한다. 지금은 복원 작업을 거쳐서 당시 쉴러가 골랐던 벽지와 가장 유사한 것으로 발라두었다. 

 

 

2. 부헨발트 수용소

  동행한 친구가 관심을 가졌던 관광지는 바우하우스와 부헨발트 수용소였다. 나는 철저히 괴테실러 오타쿠질을 하러 간 것이었기 때문에 동행한 친구에게 제법 미안하던 터였다. 시간도 잘 안 맞아서, 수용소에서는 정말 몇 시간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괴테 저택을 포기하고 수용소에 좀 더 있을 걸, 하고 후회하지만 지금은 늦었지. 바이마르에 다시 가는 수밖에 없다. 다시 가면 한 5일은 있어야 할 듯.

 

 

 

  몇 년 전에 노르만 핀켈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을 읽었다. 그 이후로 내게 있어 홀로코스트는 굉장히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가 됐다. 아직 내 생각을 고르지 못해서 이 주제에 대한 말은 아끼고 싶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수용소에서 보았던 것 중 지금까지도 마음에 깊이 남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있던 핑크 삼각형이고, 나머지 하나는 위 사진 속 골방이다.

 

 

  나치 휘하 수용소에 있던 게이 남성들은 핑크색 삼각형을 가슴에 달아야만 했다. 게이는 후대 생산에 실패한 나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나치의 이념 하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1945년까지 나치 정권에서 체포된 게이 남성은 10만명에 가깝고,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은 1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보는 내내 마음이 씁쓸한 건 아마 내가 이 '최약체 자리다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치는 여성 동성애자들을 위협거리로 간주하지 않았다. 동성애자 학살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여성 동성애자는 가시화조차 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사회 전체가 나서서 '없애려고 하는' 존재,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없는' 취급을 당하는 존재. 이 두 존재는 그러나 이 세상에 확실하게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는 저 골방에 쌓여갔다. 시체를 치우기 전 보관하던 장소였다고 기억한다. 저 방은 온 몸으로 '체험'한 것만 같았다. 짧은 시간동안 수용소를 돌아보고 버스 시간에 맞춰 급하게 이동하다가 문득 동행했던 친구에게 물었다. 왜 수용소에 관심을 갖고 이 곳에 오자고 했느냐고. 대답은, '고작 우리 나이였을 사람들이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갔다는 것에 대한 복합적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바이마르 중앙역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과거에 있었던 거대한 고통을 현대로 불러올 때의 적절한 방법과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기억이라는 행위의 능동성과 무조건적 수동성에 대해서도 함께 말이다.

 

 

  바이마르에는 남겨두고 온 것이 많다. 니체 아카이브에도 가보고 싶고, 왠지 전문가만 들어가야 하는 곳 같아서 선뜻 들어가지 못한 괴테-실러 아카이브에도 가보고 싶다. 몇 년간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찾고 있는 'ein Gedicht' 그라피티도 보고 인증샷을 남겨야 한다! 일름 공원에서 여유롭게 누워서 독일의 여름을 만끽하고 싶기도 하고, 축축한 겨울 한가운데에서 필사적으로 따뜻한 그들의 크리스마스 마켓 속으로 들어가고 싶기도 하다. 무언가를 얻으러 갔다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남겨두고 오는 여행은,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건가 보다.

 

  바이마르에 관광차 가고자 하는 관광객들에게 추천한다. '바이마르 하우스(Weimarhaus)'라는 역사박물관에 가 보시라. 걸어서 파라오의 분노 어트렉션을 타는 듯 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유치하고 나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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