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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너한테 주기엔 아까운 주제

허튼 2019. 5. 19. 13:47

  내가 공부하려고 하는 분야에는 잘 빠진 주제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그런 주제들이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지 부담스러운지 대학원에 들어오면서 투박함으로 도피했다. 섹시한 주제는 요리하기 힘든 탓이다. 그리고 나는 섹시한 주제 특유의 치열함이 싫었다. 도피한 투박함에서 나는 남들이 이백년동안 짜놓은 촘촘한 거미줄의 아주 작은 구멍을 찾아다니고, 그 구멍을 메우는 작업을 즐기려고 했다. 아직 거미줄에서 걷는 방법을 배우는 걸음마 중이라 구멍을 찾는 건 시작도 못 했지만 아무튼 그런 걸 하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뭔가 섹시해보이는 주제가 나에게 왔다. 오페라 보면서 항상 주목해왔던 주제이긴 하지만 그걸로 논문으로 쓰거나 발표를 해볼 생각은 없었는데.

  "사실 당신한테 주기엔 아까운 주제야."

  이걸 덥석 물 만한 문제의식이 내게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내게 문제의식이랄 게 있나? 없다면 지금 당장 공부를 그만두는 게 나을텐데. 있다면 그건 왜 명쾌한 문장으로 풀려나오지 못하는걸까? 나는 지금 내가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그 두루뭉술한 문제의식의 주변을 더듬대며 배회하는걸까, 아니면 산책하는 강아지가 전봇대에 오줌 갈기듯 영역표시를 하고 다니는걸까? 오만 생각들과 함께 섹시한 주제가 있다. 그리고 난 그걸 어떻게든 요리해 볼 생각이다.

  알고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나는 11월이 되기 전까지 몇 번의 게으름을 피울 테지만 그것은 그리 치명적이진 않을 것이고, 어쨌든 나는 열심히 할 것이다. 그래도 결과는 개떡같을 수 있겠지. 내 몫의 쪽팔림을 제하고도 (신경 안 쓰실 터라 그럴 리 없지만) 만약 선생님 몫의 쪽팔림이 남는다면 그건 그냥 내게 주기엔 아까운 주제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준 선생님의 몫이다. 섹시한 주제에 투박함을 우겨넣으며 힘든 여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어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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