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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 여섯 번째~아홉 번째 편지 - 인간성 분열, 인간 소외, 아름다운 예술
허튼 2018. 3. 31. 17:20텍스트: 2015,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 교육론』, 대화문화아카데미
참고 논문: 위의 책 2부에 수록되어있는 논문. 조경식, 「프리드리히 실러 『미적 교육론』의 논리 구조에 관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상적이었다. 그들은 총체성을 담지하고 있는 인간이었으며 그들 안에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별성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들 중 개별적인 면들을 각각 분해하고 확대하여 예술 작품 안에 표현해냈지만, 그것은 갈갈이 찢긴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혼합이었다. 그들은 총체적인 인간의 모범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실러가 보기에 당대의 인간은 어떠한가! 실러의 눈에 당대인(우리에겐 근대인이 되시겠다.)은 "다양한 혼합물로서가 아니라 부서진 파편 조각의 형태"로 되어 있다. 즉 전체성이 없다! "인간들 모두가 각자 소질의 한 부분만을 발전시키므로, 다른 나머지 소질은 식물에서 발육이 정지된 기관들처럼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 시계 장치는 수많은 생명력이 없는 부분들을 모아 붙여서 하나의 기계적 생명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국가와 교회가, 법과 관습들이 각각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즐거움이 노동으로부터, 수단이 목적으로부터, 노력이 보상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전체의 한 작은 개별적인 부품 조각에만 얽매여 자기 스스로를 오직 부품 조각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영원히 자기가 돌리는 바퀴의 단조로운 소음만 들으면서 결코 자기 본질의 조화를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 안에 인간성을 각인시키지는 않고, 자신의 업무 또는 자신의 학문의 단순한 복제품이 되어버렸습니다." 1
실러가 보았을 때 근대인의 인간성을 분열시킨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문화'다. 여기서 문화는 학문과 예술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경험과 사고의 확대로 분과학문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국가라는 체제 2가 복잡해지면서 분업이 확고해졌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인간의 외적인 활동은 억압당하고, 내적인 성향은 균형있게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분열을 발생시킨 것은 예술 3과 학문이지만 그것을 심화하고 촉진시킨 것은 국가이다. 국가는 인간의 개별성을 파괴하여 인간 보편의 발전을 이루었다. "전체의 추상이 자신의 빈궁한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개인의 구체적인 삶은 점차 말살"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자기 소외 속에서 시민은 국가를 친밀하게 생각하지 못하여 외면적으로 제한당하고, 문화를 통해 내면의 전체성을 확장할 수 없다. 근대인은 이렇게 이중으로 억압당하고 있기에 총체성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들을 분리시켜서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전체 세계를 위해 아무리 많은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교육의 당사자들은 이러한 세계의 저주스러운 목적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건장한 육체는 체조를 통해 만들어지지만, 아름다운 육체는 신체 각 부분의 자유롭고 균형 잡힌 움직임(Spiel) 4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결론. 근대인은 예술, 학문, 국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철저한 분업화로 인해 총체성을 상실한, 분열하는 인간이다. 분열하는 인간은 결국 물리적인 상태에 있어 제3의 성격인 미적 성격이나 도덕적인 상태로 나아갈 수 없다. 물리적인 인간은 두 방식으로 행동하는데,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폭력만을 휘두르거나(미개인), 도덕적인 것을 알고는 있지만 무기력과 사유재산에 천착하여 도덕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야만인).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개혁은 실패했다. 또한 인간이 분열 상태에 머물러있다면, 정치 개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급한 것은 인간의 자기 소외를 해결하는 일이다.
실러는 "더욱 고상한 예술"을 통해 인간 본성의 전체성을 회복하고 인간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그리고 이것은 국가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다. 인간의 분열성을 초래한 것이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떠한가? 철학은 정치적 영역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을까? 실러가 그렇다고 했다면 이런 편지가 27편이나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철학하는 '이성'은 문제와 직접 싸우지 않는다. 이성은 그의 전사를 골라서 자신의 "승리하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의 전사는 다름아닌 '충동'이다. 6
"진리가 힘들과 싸워서 승리하려면, 진리 스스로가 먼저 힘이 되어 현상의 영역에서 충동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각 세계에서는 충동이 유일한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지금까지 승리하는 힘을 별로 증명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진리를 드러내지 못했던 오성의 책임이 아니라 진리를 외면했던 가슴의 책임이고 진리를 위해 행동하지 않았던 충동의 책임입니다."
"시대는 계몽되었습니다. (...) 광신과 기만 위에 세워진 왕좌의 토대를 무너트렸습니다. 이성은 감각의 미혹과 기만적인 궤변으로부터 벗어나 정화되었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야만인으로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실러는 칸트의 삼 비판서로 인해 이성은 "정화"되고 시대는 "계몽"되었다고 보았다. 이제 더 이상 밝힐 것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하려는 충동이다. "머리로 가는 길은 가슴을 통해 열려야"한다. "용감해져라(Sapere aude!)!", "처음에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던 철학은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큰 소리로 절박하게 외치고 있"다.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는 더 이상 이성의 교육이 아니다. 이제 이성이 밝힌 것을 실천할 능력이 중요하며, 이는 감성의 교육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의 외침은 실러에게 와서 인간 총체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외침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서야(!!) 실러가 이 편지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시작된다. <인간의 미적 교육>. 국가가 제공하지 못하는 도구이자, 온갖 정치적 타락에도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하는 도구. 바로 "아름다운 예술"이다. 인간의 감성 능력을 교육하여 실천하는 충동을 기르는 것이 이 예술을 통해 가능해진다.
예술은 학문과 마찬가지로 "기성의 모든 것으로부터, (...) 인간의 자의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치외법권"을 누린다. 시대정신에 복종한 예술과 학문을 우리는 후대에 예술과 학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실러는 아름다운 예술로 어떻게 인간성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지만, 아름다운 예술이 어째서 인간성 분열 극복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는 설명한다. 아름다운 예술은 "시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가멤논의 아들처럼 무섭게 시대를 정화하기 위해 돌아온"다. 즉 아름다운 예술은 정치적인 타락에서 순수하고, 야만적인 국가 체제 영향에서 자유롭다. 따라서 예술가는 예술의 형식, 순수한 형식으로, "시대에 봉사하지 않고 시대가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한다.
예술은 기만과 진실을, 상상력의 유희와 행위의 진지함을, 가능한 것과 필연적인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예술가는 이것들을 감각적이면서도 정신적인 형식들 안에 새겨넣어야 한다. 기만과 유희, 이것이 실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술의 두 가지 특징이다. 예술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유희를 통해 필연적이 것이 아닌 가능한 것을 만들어낸다. 즉, 이것은 진실이 아닌 기만이며, 가상이다.
"그대의 원칙의 진지함은 그들을 그대로부터 쫓아버리지만, 유희 속에서 그들은 그대의 원칙을 다시 받아들일 것이다. (...) 그대는 그들의 준칙을 공격해도 소용없고, 그들의 행동을 저주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들이 한가로운 상태에서 그대의 예술적 활동을 시도해볼 수 있다. 그들의 오락 속에서 자의와 뻔뻔스러움과 조야함을 내몰아버려라. (...) 고상하고 위대하며 재치 있는 형식으로 에워싸라. 가상이 현실을, 예술이 자연을 극복할 때까지 탁월함의 상징들을 가지고 그것을 사방에서 둘러싸라."
진지함과 진실 속에서 사람들은 괜한 거부감을 가진다. 실러는 여기서 예술을 통한 미적 교육의 원리를 설명한다. 가상의 시공간에서, 유희를 통해. 예술가는 이 두 가지 예술의 무기로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깨닫는 계몽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어야 한다.
정말 궁금하다. 여기까지 따라왔는데도, 이 '아름다운 예술'이 어떻게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을 좀 설명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 전에, 먼저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것이 정말 순기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전 시대의 목소리들 중, '아름다운 예술'에 정당한 비판을 가한 "주목할 만한 목소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예술은, 인간을 정말로 분열에서 치유하고 인간을 통합시킬 수 있을까?
- 하나하나 넘 쩔어서 어디서 끊어야 할 지를 모른 채 줄줄이 인용해버렸다. 책 p. 65~66. 이거 완전 마르크스 아니냐?! [본문으로]
- 실러는 국가를 시계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었던 듯. [본문으로]
- 궁금한 점 1. 여기서 "예술"을 뭐라고 이해해야 할까? 모든것을 포함했던 기술적 의미의 art일까, fine art에 한정되는 걸까? 문맥상 예술보다 기술에 더 가까운 의미는 아니었을까? 어쨌든 원문에서는 "Kunst"다. [본문으로]
- Spiel은 '놀이', 즉 '유희'다. 슬슬 실러의 유희를 통한 미적교육의 단초가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본문으로]
- 궁금한 점 2. 왜????????????? 실러는 "어째서 그러한가"에 대해선 여기에서 대답해주지 않고 있다. [본문으로]
- 실러가 중요하게 읽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충동"을 앞장세운 것! 내겐 마치 스피노자가 인간의 감정을 비웃지 않고 철학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처음 읽었을 때 만큼 감동적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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