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하임은 뮤지컬신

아돌프 아이히만, 교수형을 앞두고 <파리 마치>와의 서면 인터뷰 본문

어디가서 말하면 안되는 것들/번역

아돌프 아이히만, 교수형을 앞두고 <파리 마치>와의 서면 인터뷰

허튼 2026. 7. 9. 08:06

 
요즘 제 마이붐... 아돌프 아이히만...
너무 재밌는 인간이라 짧게 인터뷰 하나 번역해 옴...
 
1962년 5월 잡지 <파리 마치>와의 서면 인터뷰.
독일연방아카이브에 타이포 사진이 공개되어 있음.
공개된 버전은 두 개로, 추측컨대 아이히만의 O-Ton을 누군가 타이포로 받아적은 뒤 추후 아이히만이 한번 더 파란 펜으로 검토해 추가 또는 삭제가 이루어진 듯.
 
번역을 위해서는 아이히만의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타이포 버전을 사용했다.
이유는... 아이히만의 손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알아볼 수 있었던 메모는 [ ] 안에 덧붙여 둠.
강조와 밑줄은 원문을 따름
 

아이히만 손글씨 이러니까 이해해 주세요.

 
 
읽어보면 진짜 웃긴 인간임. 아니 진짜 읽으면서 몇 번이고 육성으로 소리내서 웃었는지 모른다.
 


 
<파리 마치>, 서면 인터뷰, 답변 작성은 1962년 5월 중순에서 말 사이로 추정.
아이히만은 1962년 6월 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질문 1:
당신 자신의 운명을 제외하고, 현재 당신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답변:
내 아내와 막내아들의 미래입니다. 무엇보다 막내의 법적 지위 확립이 시급합니다. 그 아이는 1955년 11월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페케냐 콤파니아 마리아’에서 사실상 리카르도 아이히만으로 태어났으나, 서류상으로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리카르도 리블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베로니카 카타리나 아이히만, 결혼 전 성은 리블, 1909년 4월 9일 보헤미아 부드바이스 인근 로드느 출생이며, 1935년 3월 21일부터 나의 처입니다. 나 본인은 1906년 3월 19일 졸링엔(라인란트)에서 태어났으며 쾰른 관구청 관할 지역 출신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페케냐 콤파니아 마리아에서 내 아들은 "아기 아이히만"으로 태어나 출생 후 그 이름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혼외자로 등록된 이 착오는 정치적 상황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아내가 하루빨리 아들의 성명 정정 절차를 밟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질문2:
무엇을 읽고 계십니까? 누구에게 편지를 쓰시나요?
 
 
답변:
I.
a) 동생 오토가 보내준 1961 + 1962년 오스트리아 농사 달력
b) 캐나다인 헐 목사가 제공한 신약 성경
c)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은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생 로베르트가 보내준다고 했으나, 오늘까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항목은 검토 후 삭제되었다]
 
II. 편지를 쓰는 상대
아내와 막내아들 리카르도
동생 이름가르트와 매제 및 자녀들
동생 에밀과 제수 발트라우트, 우테, 베른트
동생 오토와 제수 투지, 헬가, 헬무트
동생 프리츠와 제수 잉에
동생 로베르트와 그 가족
아들 클라우스, 디터, 호르스트
며느리 엘비라와 마르티타
장모, 처형제들 및 그 자녀들 롤란트, 레나테, 다그마르, 잉그리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아내를 이곳까지 동행해 준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비서 리사 크루데 양에게 감사 편지를 썼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 집을 완공하고 개축해 준 건축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별 편지들이 가장 깁니다. 베라에게 5쪽, 잉에에게 2쪽, 에밀에게 9쪽, 로베르트에게 4쪽,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최소 2/3쪽씩, 줄이 있는 종이에 녹색 볼펜으로 빽빽하게 썼습니다. 예전과 달리 내 글씨가 불안정한데, 잘 구부러지는 바이롬 볼펜 심을 펜 깍지 없이 사용한 탓입니다.
 
그 밖에 작별 편지는 세르바티우스 박사님, 당신께도 썼습니다. 당신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에 대해서도 허가를 받았습니다.
가족에게서 편지를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감옥에서, 낯선 나라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혹은 그 이상 떨어진 곳에 갇혀 있어 보지 않으면 모를 겁니다.
적어도 자기 생각이라도 마음껏 산책시킬 수 있고, 책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외부인으로부터는 우편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르바티우스 박사님, 당신께선 재판이 시작된 이후 나에게 보내온 편지들이 당신 쪽에 쌓여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여기 언론은 (헐 부인의 말에 따르면) 16세의 캐나다 소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를 양녀로 삼아 달라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세르바티우스 박사께서 당시 수많은 편지들 중에서 16세 캐나다 소녀의 편지를 내게 읽어주셨는데, 아주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편지에서 내가 자기 아버지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하더군요. 아내 베라가 면회를 왔을 때, 나는 그 다정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소녀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소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작은 캐나다 소녀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대량학살범이라는 언론의 떠들썩한 소문과 나에 대한 공소 내용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하는 게 더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만은. 요즘은 수억 명의 사람들이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믿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방에서 포화가 쏟아지고, 너무도 끔찍한 혐의들에 내맡겨져서, 나 스스로도 내가 그 포화를 그나마 침착하게 견뎌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용감한 작은 캐나다 소녀의 행동은 진정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소녀는 자신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겁니다.
나는 베라에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면 법적으로 허용되는 한 기꺼이 양녀로 삼겠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내 딸로 여기면 된다고.
만약 가난한 아이라면, 나와 베라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금하여 그 소녀의 학업을 지원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질문3:
당신의 재판이 공정하고 적법하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의제기나 비판할 점이 있습니까?
 
 
답변:
이스라엘 경찰관들과는 지난 2년간 좋은 경험만 했습니다. 다만 이곳의 재판권과 구속조치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습니다. 1심 판결은 나를 실망시켰으며, 항소심 판결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새로 신청한 증인들 중 단 한 명도 채택되지 않은 것은 개인적으로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5월 6일부터 나의 하루 담배 할당량이 8개비에서 10개비로 늘었습니다. 니코틴의 노예로서는 아주 기쁜 일입니다.
 
 
 
질문4:
당시 SS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모두 신앙과 종교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신이 이젠 신앙을 되찾고 교회와 화해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답변:
당시 교회를 탈퇴하라는 명령이나 강요는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자발적인 결정을 어느 정도 도와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들은 바에 따르면, 자기 아내와 함께 여기까지 방문한 캐나다인 선교사 헐이 “내 영혼을 사탄으로부터 빼앗아오겠다”고 자랑하고 다닌다 하더군요. 마치 그가 람레에서 나와 내 아내의 면회를 주선했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마지막 주장은 확실히 사실이 아니므로, 이로부터 앞의 주장의 진실성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실 겁니다.
이에 대해 지금 당장 떠오르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적어둡니다:
 
성직자들이 죽음의 그림자 아래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려 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것은 이 분들의 아름다운 품성이며, 거기에 대해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나 역시 아직 몇 가지 관심 있는 문제들이 있기도 합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기 일을 정리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문턱을 넘어가는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 모두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헐 목사 부부에 따른다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멸망하고 저주받아야 합니까? 내가 믿는 신은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너무나 위대하시고 그의 사랑 안에서 이미 무한한 세월 전부터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기에, 2,000년 전에 갑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 생각을 떠올리실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약 20억 명의 이슬람교도, 불교도, 브라만교도 등등이 모두 저주받았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제게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요.
 
나는 사랑의 신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선한 헐 목사는 나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머릿속에서 믿을 만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라면, 논리적 관점에서 분명하게 납득이 된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 동생 로베르트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에서 나는 철학 교수에게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칸트, 쇼펜하우어, 플랑크(양자역학의 플랑크입니다!), 하이데거(린츠의 바이올린 판매자가 아닌 실존주의자), 그리고 하이젠베르크(핵물리학자)가, 그들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기독교 교회의 가르침과 화해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는지를요. 내가 이 위대한 사상가들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다고 감히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에 대한 나의 태도와 관련하여 그것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질문5:
당신에게 56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한 집시 여인의 예언을 아직도 믿으십니까?
 
 
답변:
아르헨티나 산맥에서 자유롭던 아름다운 시절에 만난 그 집시 여인의 예언에 만약 내가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했다면, 아마 무엇보다도 그 노파의 외모가 너무나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를 점성술 신봉자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점성술이나 미신을 비난할 자격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위 점성술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기꾼 기질이 있어서 노골적인 협잡꾼들과 다를 바가 없으며, 그 때문에 관련 문헌을 읽으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
 
 
 
질문6:
당신은 무죄(유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수송 책임자로서 당신은 유대인 학살(최종해결책)에 분명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유죄가 아니다”는 말은 동시에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의미합니까?
 
 
답변:
최근에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다가, 이런 말씀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자를 돌로 쳐라!
 
기독교는 오늘날까지도 국가지도부가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들에게서 지혜를 얻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 물고기들의 지혜란 작은 물고기들을 머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삼키려는 것뿐인데도 말이죠.
이런 국가지도부는 기껏해야 포식자들의 영역에 들어갈 뿐입니다. 거기서 얻은 통찰을 가지고 국가지도부는 명령과 프로파간다를 통한 교활한 간계로 시민들, 특히 명령을 받는 사람들을 적절히 가공하여 도덕 법칙이라며 강요하죠.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소수의 국가지도부를 세는 데 내 손가락 다섯 개를 전부 접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국가지도부가 살인과 절멸을 명령한다면, 아무리 숭고한 소크라테스-플라톤적 지혜나 칸트의 사상적 성과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국가지도부는 법을 제정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명령권자 아래에는 장군, 대사, 부처장, 차관보 등 거부권을 가진 하위 명령권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명령을 받는 사람이 불복종하면, 즉시 국가지도부가 그를 체포할 겁니다.
복종하며 업무상의 의무에 매인, 명령 받는 입장의,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표적이 됩니다. 일의 결과는 항상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전가되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유죄일 겁니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삶에서 더 고차원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옮음이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일까요? 명예, 충성, 옳음 등등에 관련된 초월적 개념 Transzendentalien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걸까요?

우리나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좋은 국가지도부보다 나쁜 지도부를 더 많이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기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회학자,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들이야말로 집단적 공동생활이라는 영역에서 새로운 인식을 찾아내고, 선전하고,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식은 지속적인 완성과정이라는 노선에서 퇴보를 점점 더 배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고요.
그럼 관점에서 본다면 대량학살과 핵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대에게 산다는 것은 기쁨이라고 여전히 말해줄 수 있겠습니다.
인간이 죽음이라고 잘못 부르는, 영혼의 탄생이라는 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무(無)도 없고 안식도 없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완성되어가기 위한 논리적 발전 안에서, 존재의 과정 속 단지 그 다음의, 하나의 단계일 뿐입니다. 이것이 나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나 자신의 죄요?
 
글쎄, 감당해야지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운명이 나라는 인간을 가지고 세상에 이 끔찍한 사건들을 기록하는 괴물 같은 재판을 치르도록 했다면, 그리고 명령을 내리는 정부들이 이 재판을 계기로 궁극적으로 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이후로는 누구도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르지 않는 행위를 강요받지 않게 된다면, 나는 운명에 감사하며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 재판을 찬양하라!
하지만 항소심 판결에서 드러났듯이, 제가 법리적 위장 아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희생된다면,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이 재판은 헛수고일 겁니다...
 
그리고 제가 자발적으로 교수형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청년들에게 경고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독일 청년들을 죄책감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의미였습니다 ... 그럼으로써 나는 어떤 개인적 죄를 짊어진 게 아닙니다.
 
 
 
질문7:
당신이 “피해자/희생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또는 누구에 의한 희생양입니까?
 
 
답변:
이는 방금 무죄-유죄가 아님에 관한 질문에서 대답했습니다.
 
 
 
질문8:
당신의 아내분께선 우리에게, 이 대량학살에 대해 더 고위직의 책임자들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당신보다 나치 위계에서 훨씬 높은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아직 자유의 몸인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 이름들을 밝힐 의향이 있습니까?
 
 
답변:
교수대가 코앞에 있지만 체면을 잃고 싶진 않습니다. 누구도 고발하지 않겠습니다. 1945년 이후 모든 것을 나,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전가했던 자들의 전철을 밟지도 않겠습니다.
이스라엘 판사들이 소위 상호 사법 공조 요청에 따라 나를 증인으로서 신문하려 했을 때도 난 침묵을 지켰습니다. “아데나우어 박사와 글로브케 박사 대 신원미상”이라는, 겉보기에 중요해보이는 건에서조차 말입니다.
내 변호인은 항소심 변론에서 이 예민한 상처를 들춰내고, 저는 단지 하찮은 연결고리에 불과했던 그 이른바 책임자들의 “사슬”을 밝혀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항소법원은 우리가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이름을 거론한 모든 증인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 증인들과 직접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회틀, 식스, 베허, 페젠마이어... 베츨 박사든, 심지어 그게 글로브케 박사라 할지라도.
나는 증인 진술이 얼마나 큰 오해와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지 몸소 경험했습니다. 나는 그것에 동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검찰 당국은 내가 밀고하길 쓸데없이 기다리는 겁니다.
만약 서독이 내 증언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다면, 나를 서독으로 송환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데나우어 총리는 말 그대로 인용하면 “아이히만은 변호할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서독의 다른 사람들은 분명 “변호할 가치”가 있겠죠... 글로브케 박사를 비롯한 모든 다른 사람들은 운명이 마련해 둔 자리에 앉을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부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국무장관 자리를 주고, 누구에게는 교수형을 선고하는 사법부의 지혜만큼은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스 글로브케(현재 고위직에 재직 중)는 당시 “법률 공장”에 앉아 이 모든 일의 토대를 마련했으니, 전문성을 가진 증인으로 소환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을 겁니다.
물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글로브케는 당시에는 명령을 내리는 쪽이 아니라 명령을 받는 쪽이었습니다(비록 저보다 높은 직책이었지만).
글로브케가 항소심에서 기각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형된 후에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줄 파장이 일어날 것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참조하십시오.)
늦어도 다음 세대는 나를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만큼 분명하게 아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럴 거라고 느낍니다.
 
 

[질문8에 아이히만이 검토용 파란 펜으로 남겨둔 메모: 아니오. Nein.]

 
 
 
질문9:
독일 국민의 3분의 1이 유대인들에 의해 추방되고 살해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수송 책임자를 재판에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답변인지 불분명]
 
히로시마 -
나가사키 -
동쪽에서 온 난민들 -
행방불명된 전쟁포로들
 
 
 
질문10:
만약 당신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나치 지도부에 지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답변:
공소장이 낭독된 직후에 이미 나는 놀라서 스스로 되물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재판을 받고 있는 거지, 히틀러인가, 힘러인가, 아니면 나, 친위대의 작은 담당관 중령?
내가 개인적으로 알았고 또 나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민족사회주의당 및 국가의 주요 지도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46년까지 나의 존재감은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회틀이라는 자, 현재 바트 아우제에서 교사로 있는 그가 나를 5백만 내지 6백만 유대인의 학살자로 낙인찍었습니다. 바트 아우제의 그 말쑥한 정보기관장 회틀은 정말로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이 회틀이라는 자는 하지만 내가 경멸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유일한 인사이기도 합니다. 나머지는 이름은 잃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체면을 잃고 비곗덩이 속 구더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서독에서 증언할 때 자신들의 옛 영광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다던 자들,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기들의 현재 모습과는 반비례로 예전엔 승진과 훈장을 두둑이 챙겼던 자들 말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았던 민족사회주의 지도부 중 칼텐브루너 박사는 항상 변함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1945년 5월 8일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고, 그는 1946년 10월 15일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에게 무슨 비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이드리히, 그의 냉철하고 날카로운 지성은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했으며, 그는 자신이 추진한 최종해결책의 원인과 결과뿐만 아니라 규모와 범위까지도 아마 유일하게 꿰뚫어 보고 계산에 넣은 인물이었습니다. 내가 린츠의 늙은 역사 선생님께 배운 것이 사실이라면 (아돌프 히틀러를 가르친 선생님과 같은 분은 아닙니다. 그것도 아이히만을 둘러싼 전설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 나는 아마 저승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다시 만나 예루살렘 재판의 수많은 미해결 문제들을 논의할 충분한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이드리히는, 나는 확신하건대, 모든 것에 대해 논리적이고 강력한 설명과 근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존경하는 직속상관 뮐러 장군, 전문 형사이자 고위급 경찰인 그는 — 덧붙이자면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역시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 소문에 따르면 이른바 철의 장막 뒤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만, 뮐러가 다른 몇몇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구권의 사회 체제가 인종적 광기와 인종혐오가 민족 말살로 이어지는 것을 근절할 수 있는 보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제적 서구권 대자본, 과잉 발달한 사적 자본주의야말로 악의 뿌리입니다.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은 사적 자본주의적 폭리를 위한 놀이터이자, 평화, 안전, 평온을 향한 모든 민족의 열망과는 반대되는 것들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만약 오늘날 제가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있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들 지도부는 결국 국제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 게임은 민족을 희생시켰을 뿐이라고. 반면에 공산주의적 세계관은 전 세계 노동자와 농민을 포괄하며, 인종혐오, 살인, 그리고 대량 학살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제거합니다. 미래 세대의 평온과 안전, 그리고 평화를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 교리의 실현보다 더 확실하고 나은 것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민족사회주의 지도부에, 내게 명령을 내린 사람들에게 되받아치고 싶은 말입니다. 언젠가 미래에 명령을 받는 사람들이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나는 거대 금융 자본과 급진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은 지도부 사이에서 오가며 놀아난 공보다도 훨씬 하찮은 존재였으니까요.
어쨌거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차피 누구와도 만날 수 없을 겁니다. 몇 년 전 남미에서 만났던 몇몇 사람들은 이름과 과거,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완전히 바꾸고 가족과 민족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세상이 아직 찾고 있거나 죽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 중 일부는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드러나지 않고 살아가겠죠. 누구에게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들에게 언젠가 책임을 물을 기회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아... 진짜 이렇게 짜증나게 자기연출 하는 사람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진짜 열받아서 한대치고싶음 
너무 웃긴 인터뷰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이것저것 뒤져보면서 알아낸 몇 가지 트리비아도 아래에 함께 달아둠...



<나의 도주>에서 모사드가 납치했을 때 정황을 적어뒀는데 뭔 "다음날 나온 아침밥은 맛있었다", "음식에 대해서는 나무랄 데 없었다" 이러면서 밥 잘 먹고 이스라엘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여자 스튜어디스가 과일쥬스 주고 밥도 챙겨줬따" 이런 거 써놓은 게 진짜 열받아서 잊히질 않음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