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하임은 뮤지컬신

[연극과 기후위기]/[미완] 브뤼노 라투르, 프레데리케 에이-투아티, 토마스 오버랜더 인터뷰 번역 본문

어디가서 말하면 안되는 것들/번역

[연극과 기후위기]/[미완] 브뤼노 라투르, 프레데리케 에이-투아티, 토마스 오버랜더 인터뷰 번역

허튼 2023. 2. 17. 12:56

 

 

  번역해보자고 시작해놓고 한 달 반째 미루다가... 결국 이 인터뷰 번역을 재개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이미 번역해둔 - 그저 변죽을 울릴 뿐인 부분까지만 올려두고 미완성으로 남겨둘까 한다. 끝까지 번역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중도에 흥미를 잃어서고... 그럼에도 포스팅하는 이유는 라투르가 죽기 전에 연극 실제에 발을 담궜다는 사실을 소개하기 위해서. 

 

 

--------------------------

 

왜 가이아는 새로운 존재론인가

 

  기후변화에 관한 예술적 입장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전시를 기획하는 대신, 2020년 베를린의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Down to Earth”는 전시와 축제 진행의 운영체계를 공개하고 부분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시도했다. 관리팀과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약 200 명의 예술가, 학자, 일상의 전문가들의 기본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비행기 타지 않기, 사용된 재료들의 투명성, 지속가능한 방법들(예컨대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아날로그적 작품들만을 공연하기). 이 4주간의 기후-, 예술-, 토론 프로젝트는 여러 단체들로 구성되었다: 2000제곱미터의 동시대 미술, 전자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퍼포먼스와 음악 프로그램을 위한 많은 공간들, 전문가들의 공적 담화 내지는 파리와 아테네에 있는 두 아카데미의 작업공간 등.

 

  제목인 “Down to Earth”[각주:1]는 브뤼노 라투르의 기후변화 에세이 『지구적 선언』에서 영감을 받았다. 현재의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라투르는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연극을 시의성 있는 정치적 주제들과 관련된 폭넓은 열정들을 탐구하기 위한, 철학보다 더 오래되고 더 유연한 매체로서 활용한다. 프레데리케 에이-투아티 Frédérique Ai͏̈t-Touati는 “Down to Earth”에서 여섯 명의 ‘정치적 예술 실험’ 트랙 학생들과 전시 프로그램 내에서 열린 실험실을 진행했고, 공연 <INSIDE>와 <Moving Earths>를 전기장치를 활용하지 않은 버전으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 『갈릴레이의 생애』를 논쟁시키는 시의적절한 세계상의 전환에 대해 보여주었다.

 

 

공연 사진

 

가이아를 무대화하기

무대, 기후 그리고 의식변화

 

Staging Gaia.

Bühne, Klima und Bewusstseinswandel

 

- 브뤼노 라투르, 프레데리케 에이-투아티, 토마스 오버랜더 인터뷰

 

 

브뤼노 라투르: 오버랜더 씨, 우리가 오늘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 짧게 설명해주시겠어요?

 

토마스 오버랜더: 우리에겐 당신의 책 Down to Earth가 브레히트적 의미에서 – 작은 지침서였습니다. 행동의 변화를 위한 실마리, 실용적인 도구죠.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진행한 같은 제목을 가진 우리의 프로젝트의 의도와 아주 가까이 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작업에서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당신과 프레데리케가 연극에 매료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책에서 계속 연극의 메타포를 사용하지요. 당신은 “오늘날엔 모든 것이 – 장식, 무대장치, 무대배경: 전체 건축물이 – 무대 위에 올라가고 배우들과 주인공 역할을 두고 경쟁한다”고 씁니다. 멋진 생각이에요. 무대 위에서의 갈등이 인간과 인간 사이 Zwieschenmenschliche의 영역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 무대를 구성하는 이 모든 설비들도 똑같은 행위자들이다.[각주:2] 이는 제게 제임스 러브록의 지구에 대한 “체계적” 관점을 상기시킵니다. 그의 가이아 이론은 갈릴레이가 약 400년 전에 근본적으로 세계상을 전환시켰던 것과 비슷한 영향을 끼쳤죠.

 

라투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09년 하늘에 망원경을 가져다댔을 때, 그는 달 표면에 있는 산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달은 또 다른 지구가, 지구는 다른 여러 별들 중 하나가 되었죠.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시대의 우습지만 또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혁명적으로 바꾸었습니다. 4세기 후 우리 행성의 역할과 위치는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지구에 예상치 못한 반응을 촉발시키는지 설명하는 새로운 과학을 통해 한 번 더 뒤바뀌게 됩니다. 갈릴레이는 우리에게 지구가 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과 린 마굴리스는 지구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죠. 그들은 공간과 시간이 생명체들의 행위의 산물인 행성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키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전체 조직은 다시금 질문에 부쳐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1610년에 지구가 돈다는 사실의 충격을 극복했다면, 오늘날 지구가 진동하며 인간의 행위에 반응하고, 심지어는 인간의 진행 중인 프로젝트 전체를 어느 정도 제한할 것을 명령하고 우리 생각의 재조정을 요구한다는 더더욱 충격적인 인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말입니다.

 

오버랜더: 당신들은 러브록과 가이아 테마에 대해서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작품들과 전시들을 꾸렸습니다. 저는 당신들과 브레히트에 대해, 그리고 그의 연극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요, 왜냐하면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는 당신들에게도 중요한 기준점이었기 때문입니다. <Moving Earths> 프로덕션에서 당신들은 미국에서 나온 – 당신들의 연극 형식과는 기본적으로 정반대에 있는 전통적 코스튬영화인 – 저 작품의 1975년 영화 버전을 활용했죠.

 

라투르: (웃는다)

 

프레데리케 에이-투아티: 맞아요! 라투르 씨는 이 영화에 정말 매료되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 영화를 활용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제작하는 연극과 너무 다르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죠. 당연히 그 영화를 활용하며 어떤 긴장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장면적 표명에서 결국 이 영화와 같은 허구를 역설적 “증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버랜더: 이미 아주 예전에 파스퇴르에 대한 라투르 씨의 책 작업에서 증명의 연출이 다루어졌지요. 프레데리케 씨, 당신의 에세이 <정치적 연극에 비인간이 등장할 때 When non-humans enter the political stage>에서 당신은 라투르 씨의 저 연구에 대해 연출가로서의 관심을 설명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증명을 연출하는 방식이 흥미롭다고요. 라투르 씨는 『판도라의 희망』에서 무엇보다 유산균효소 발견에 대한 증명을 모든 사람에게 공표하려는 연극적 상황을 파스퇴르가 어떤 천재성을 가지고 만들어냈는지 서술합니다. 브레히트 또한 완전히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 시대의 연극”을 발전시키길 원했어요: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갈릴레이는 46세이고, 작업은 정체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남자가 그에게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옵니다. 이 도구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세계상을 모든 사람에게 공표할 수 있죠.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갈릴레이를 위대한 사람, 유일한 사람, 정신적 거인으로 보여줍니다. 당신들에게는 다르게 보인 것 같군요.

 

 

브레히트 2.0: 러브록의 생애

 

라투르: 이 문제는 제가 갈릴레이와 러브록 사이에 거리낌없이 평행선을 긋길 원해서 에이-투아티 씨에게 혹독하게 비판받았을 때 발생했죠. 에이-투아티 씨는 “우스운 일이에요. 우리는이 위대한 남자 갈릴레이와 20세기의 또 다른 위대한 남자 사이에 남성중심적 평행선을 그을 순 없어요,  21세기에 말이죠”라고 말했어요. 제 첫 번째 기획은 그러니까 바뀌어야 했죠. 게다가 갈릴레이가 16세기나 17세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표상도 거짓이었거든요. 그는 일단 그를 가능하게 한 학문적, 사회적 환경에 차라리 심어진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인물들의 대사 분량을 새롭게 분배해야만 했죠. 유감스럽게도 2011년에 돌아가신 과학자 린 마굴리스의 줄거리를 연관시키고, 그러고 나서 러브록으로 돌아오도록요. 그는 이제 101세고요...

 

에이-투아티: 브레히트는 좋은 출발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갈릴레이와 과학 시대 사이에 연관성을 맺었으니까요.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 Kleines Organon für das Theater』에서 그는 자신이 과학 시대를 위한 연극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초기 근대의 우주론과 물리학의 방식은 러브록과 마굴리스의 가이아 이론을 통해 의문에 부쳐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행선 외에도 동시에 전환을 구현해야 했던 겁니다. 라투르 씨가 언젠가 말했지요. “좋아요, 우리는 러브록의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브레히트가 필요합니다. 브레히트가 갈릴레이의 이야기를 설명할 때 그는 17세기의 사회적 변혁과 우주론적 혁명을 관련시켰어요. 이제 우리는 러브록의 이야기, 가이아의 발견과 그 정치적 귀결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주론적 질서의 전환과 정치적 질서의 전환 사이의 연관성을 세우기 위해서 또다시 드라마 작가가 한 명 필요합니다.”

갈릴레이와 러브록의 평행선은 이미 어느 정도 연극적 상황을 구현하는 한 가지 직관을 따릅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지구가 다른 행성들 중 하나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반대로 러브록은 아주 예민한 도구로 지구를 보고 지구가 유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화성인을 상상하죠. 이미 말해졌듯, 문제는 브레히트가 과학사의 오랜 전통에 의거해 갈릴레이를 근대성의 길을 다지는 영웅적 인물 형상으로 양식화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남성 과학자를 유일한 주인공으로 삼는 이런 종류의 역사들은 더 이상 서술할 수 없어요. 파스퇴르에 대한 라투르 씨의 책은 이런 서술 방식에 대한 완벽한 비판입니다. 무엇보다, 가이아 발견의 역사는 훨씬 복잡하고, 흥미롭고, 집단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가 『갈릴레이의 생애』를 간단히 <러브록의 생애>로 전환시킬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라투르: 우리는 영웅은 없지만, 가이아는 있지요.

 

오버랜더: 가이아는 여성적 인물인가요?

 

라투르: 가이아는 여성입니다. 하지만 가이아는 무엇보다 신화적이고 꽤 거대한 인물이에요. 유명한 남자의 이야기를 또다시 서술하지 말고, 가이아의 ‘새로움 Neuartigkeit’에 대한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연극을 사용하자는 것이 아이디어였습니다. 사실 에이-투아티 씨는 가이아의 현전을 무대 위에 보여주길 원했어요. 저는 제가 항상 관심이 있었던 이론적 컨셉의 드라마화를 통해 거기에 도달했죠. 40년 동안 저는 주로 첫 학기 학생들을 가르쳤거든요. 대학에 처음 들어온 초보자를 가르치려면 너무 복잡해서는 안 되고, 한 컨셉을 드라마화해야 돼요. 위대한 과학자가 어떤 발견을 하고 이것을 대중에게 보여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파스퇴르에 관한 작업에서 확인하고 저는 아주 놀랐습니다. 제가 “증명의 연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에이-투아티 씨의 뭔가를 작동시켰어요. 에이-투아티 씨는 연극의 관점에서부터 비슷한 질문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오버랜더: 브레히트의 역사극들에 관해 보토 슈트라우스가 쓴 아주 흥미로운 비평이 있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이 역사극들이 인공두뇌학 시대 이전을 증언하고, 세계에 대한 기계적 이해를 반영한다는 겁니다: 원인과 결과, 선형적 과정이 중요하다고요. 슈트라우스는 1990년대 초에 우리의 현재적 세계상이 회귀, 창발성, 카오스이론과 같은 현상들과 컨셉들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무엇보다 우리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들, 풍경들, 사물과 기술들이라는 행위자들과 관련시키는 시스템과 네트워크에 파묻혀 있는 우리의 존재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세계관적 이유로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미학과 그 주장들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그것들이 실천의 영역에서는 너무 폭력적이었고, 학문의 영역에서는 너무 선형적이었기 때문에요.

 

라투르: 우리는 이 선형적 발전 속에서 선형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발전이 바로 러브록의 순환적 피드백-사유와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더욱 드라마적이었지요. 우리는 이 마지막 장면, 갈릴레이가 자신의 “선형적 고찰방식”에서 비롯된 그 범죄에 사죄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해야 할지 결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갈릴레이는 그 장면에서 이렇게 말해요. “과학자들이 지식을 위해 지식을 쌓아올리는 데서 만족하는 이기적인 권력자들 앞에서 쩔쩔맨다면 학문은 병신이 되어버릴 수 있고, 너희의 기계들은 단지 새로운 고난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너희는 시간이 지나면 발견해야 할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건 단지 인간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진보에 불과할 것이다. […] 내가 저항했더라면, 자연과학자들이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은 것, 너희의 지식은 인간성의 안녕을 위해서만 사용하라는 맹세를 발전시킬 수 있었더라면.” 그러니까, 러브록 역시 영국을 위해서만 연구했다고 하더라도, 이걸 단순히 적용시킬 수는 없죠.

제가 맨 처음에 브레히트의 각 개별 장면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을 러브록의 관점에서 활용하려고 단지 문장들만 수용하도록 바꾸었던 건 제가 순진했던 탓입니다. 그렇게 저는 카니발이 열리는 한 작품에 대한 긴 묘사를 했죠(웃는다). 작은 사제의 에피소드처럼 당연히 아주 가볍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작은 사제는 자신의 부모를 회의 속에 빠트리고 싶지 않은 나머지 학문을 포기한다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갈릴레이의 발견에 대한 증명이 제후의 천문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 의해 가상논쟁들 속 파도를 이유로 무시되는 장면도 당연하고요...

 

오버랜더: 그들이 커다란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기를 거절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죠.

 

라투르: 정확히 똑같은 장면이 러브록에게도 있습니다. 행성이 스스로를 조정할 수 있고 생명들을 살아있도록 하는 바로 그 피드백에 대한 정의는, 계속해서 다양한 분과학문들에 의해 부정되죠. 이렇게 거의 문자 그대로 일대일 적용하는 것은 결국에는 브레히트처럼 전통적이고, 우리는 그렇게 하기는 원하지 않았던 작품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에이-투아티: 그 작품은 시범공연이었고, 그걸 우리는 마침내 갈릴레이와 러브록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쇼케이스로 활용했습니다. 중요한 건, 브레히트가 우주론적 논증과 정치적 논증을 결합한다는 점이죠. 그것이 이런 병치의 주요 이유 중 하나였고, 끝까지 우리 작품에서 유지했던 것이었습니다. 

 

(후략)

 

--------------------------

 

  인터뷰는 이 뒤로도 꽤 길게 이어진다. 문제는 내가 흥미를 잃어서...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원문을 여기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Thomas Oberender (Hg.): Down to Earth. Entwürfe für eine Kultur der Nachhaltigkeit. Berliner Festspiele / Imersion 2021. S. 174-197.

 

--------------------------

 

 

  이 아래는 라투르와는 아무 상관 없는 기후위기 연극 얘기. 

 

  최근 독일 연극계에서 기후위기를 주제화하는 공연이 부쩍 많아졌는데, 라투르도 그 일환에서 연극 제작에 참여한 것임. 라투르 같은 인문사회과학사인류학자(...) 뿐 아니라 실험실과 필드의 과학자들이나 환경운동가들도 이런 연극에 참여하고 있다. 베를린에 거점을 둔 '인류세의 연극 Theater des Anthropozän' 프로젝트 팀(하이너 뮐러 연구자이자 드라마투르그인 프랑크 라닷츠 Frank-M. Raddatz가 이끌고 있음)이 2021년에 올린 연극 <인류, 독재자 (오이디푸스) Anthropos, Tyrann (Oedipus)>(Alexander Eisenach 작)은 지구시스템학/해양생물학자 안트예 뵈티우스 Antje Boetius가 직접 텍스트 일부를 제공하고 무대 위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연극 자체가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를 쓰까서 만든 텍스트콜라주였는데, 코러스가 "기후위기가 우리탓이라는 건 그렇다고 하자!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건데!? 우린 예언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아폴론 신전의 예언자 퓌티아 역으로 과학자 뵈티우스가 등장해 코러스와 인물들과 관객들을 계몽시켜주는 컨셉이었음... 어이가 없죠.

  나는 기후위기 연극이라는 이 유행이 얼마나 유효할지 회의적이기만 하다. 저 공연에 대한 연극전문잡지 테아터 호이테 비평 첫부분이 이런 유행 전체를 아우르는 듯 함: "뵈티우스 같은 저명한 과학자가 연극과 결합했다는 것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놀랍다. 기후연구자들의 절망이 너무 커서 이런 길을 고려할 정도거나 - 아니면 연극이 느슨하게 소비되는 저녁 유흥을 넘어서서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다가갈 거라는 신뢰가 압도적이거나 할 것이다."

  물론 비평가는 후자를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같지가 않다. 이런 연극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모든 에너지와 거기서 부차적으로 생산되는 각종 쓰레기 폐기물들을 생각해보면 이 연극을 올리는 돈과 시간으로 환경운동단체에 기부를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꽤 오랫동안 고민함. 그리고 이 고민은 환경문제가 아니더라도 전쟁, 난민, 빈곤문제 등 당장의 목숨이 걸린 문제에 대한 연극 모두에 해당한다. 시리아 난민을 오페라 <나부코>의 합창단으로 올려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도록 한다고, 하르츠4(기초수급) 수령자를 페터 바이스의 <마라/사드> 속 코러스로 올려서 마라에게 "우리의 혁명은 어떻게 되었나?"를 부르짖도록 한다고, 러시아에 정치범이라는 명목으로 끌려간 우크라이나 반전운동가들의 사진을 <돈 카를로스> 공연에서 들어올리며 "사상의 자유를 허락하소서, 폐하!"라고 외친다고, 입센의 <민중의 적>을 익명의 도시 시장의 테슬라 공장 유치에 대한 문제로 개작한 작품에 청소년 환경운동가들을 등장시켜 리튬이온배터리는 미래가 아니라고 말하게 한다고 - 대체 뭐가 어떻게 변한단 말인지? 단지 공연을 만들어 지원금을 타려는 자들과 그걸 편안한 좌석에 앉아 안락하게 향유하는 자들의 알량한 위안거리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말하지 않는 것보다 어떤 형태로든 말하는 것이 낫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제들은 연극이 아닌 다른 형태로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질 수 있고, 말해지고 있으니까, 연극은 연극의 길을 찾아야 되지 않느냐는 거임...

  10월에 폴란드에서 열리는 기후위기 연극/드라마/연극텍스트 학회에서 어그로 잔뜩 끌고 답을 얻어올 수 있길 기대해 봄... 니들은 뭔가 답이 있으니 이런 유행도 만들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거겠지. 일단 저 '인류세의 연극' 수장 라닷츠는 연극은 처음부터 인간 외 존재들을 무대 위에서 동등하게 보여주고 인간과 인간 외 존재들 사이의 결합과 혼종을 강조하는 장르였기 때문에 연극이 아주 적절한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진짜 싫다 니들 전부...

 

 

 

 

  1. 브뤼노 라투르의 책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 Où atterrir?』의 영문판 제목. 한국어로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으로, 독일어로는 『지구적 선언 Das terrestrische Manifest』으로 번역되었다. 정치적인 방향이 이미 뚜렷한 책인데 독일어 제목에서 더 심해졌음...ㅋㅋ [본문으로]
  2. 이 말에는 헤겔리언인 페터 스촌디에 기반한 [이상적] 드라마 개념(드라마를 구성하는 본질적 특성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 구조다)과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론을 대조시키려는 의도가 기저에 있음. [본문으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