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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빙겐 교환학생] 한국 가기 D-90 본문

사담/2017 튀빙엔 교환학생

[튀빙겐 교환학생] 한국 가기 D-90

허튼 2017. 11. 24. 07:51

이제 막 교환학생을 신청하려는 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유럽은 반드시 여름학기,


유럽은


반드시


여름학기.


4계절을 모두 겪어보니 알겠다. 겨울의 유럽은 너무도 우울하다.


오늘 저녁엔 탄뎀친구를 만났다. 왜 이 놀 것도 없고 심심하고 좁은 동네 튀빙엔으로 왔느냐고 물어보더라.

원래 내가 교환학생으로 가고싶었던 학교는 베를린의 자유대학이었다. 내 모교는 독일어권/영어권 교환학생 지원자가 나뉘어 있고, 영어권 지원자도 기타 언어권에 지원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기타 언어권 지원자를 우대해주는 시스템으로 교환학생을 뽑는다. 따라서 독일어권 지원자였던 나는 지원했더라면 반드시 자유대학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지망을 자유대학이 아닌 튀빙엔으로 썼다. 자유대학은 1학기 교환밖에 뽑지 않아서였다. 나는 1년동안 독일에 있고싶었고 1년 교환을 뽑는 곳은 튀빙엔뿐이었다.


나 말고 이런 분들이 꽤 있을 것 같다. 생각을 많이 해 보고 결정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때로는 아쉬울 때 그만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최근 고민이 많아졌다. 1년동안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우선 친구들을 얻었다. 좋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가끔가다 한번씩 약속을 잡아 만난다면 몇 번이고 교환 기간동안에 '우리'가 겪었던 이야기들을 질리지도 않고 풀어낼 것이다. 세 번이든 삼십번이든 삼백번이든 웃긴 이야기에는 항상 웃을 것이며 힘들었던 이야기에는 항상 탄식을 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튀빙엔 Stiftkirche 종탑에서 찍은 청춘사진. 이 친구들은 한 학기 먼저 한국으로 갔다.

나 혼자 남아 튀빙엔을 지키는 시간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둘째로 유럽의 좋은 공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내한도 잘 안 오는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티켓값과의 등가교환이었지만 한국에서 그들의 공연을 보려면 얼마나 더 비싼가. 내 눈과 귀는 그만큼 더 넓어졌으리라. 그리고 내 장래희망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고등학생때는 뮤지컬 프로듀서가 되겠답시고 설쳤다가 대학교 들어오고 3년동안 방황하더니, 다시 공연쪽으로 - 이제는 오페라지만 - 시선을 돌리게 될 줄은.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자존감을 잃었다.

영어도 못하고 독일어도 못하는, 아니지, 아예 못하면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다. 애매하게 할 수 있는, 사실상 0개국어 가능자로 살아가며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불가능언어의 바다 속에서 지난 8개월동안 서서히 익사했다. 이제는 90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글쎄, 저 남은 기간을 정말로 버틸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자신이 없다.

자존감의 상실은 치명적이게도 언어능력의 상실과 직결되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일어 회화 이 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잘 할 것이다. 나는 언어를 잃었다. 물론, 나의 문제고 나의 성격 문제다. 그렇지만 내 성격이 그리도 유별난가? 아니다. 분명 나 같은 사람은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러니 1년 교환을 준비하는 분들께 당부드린다. 오래 생각해보시라고. 한 학기도 짧은 시간은 아니다.


90일 남은 이 시점에 나는 뭘 하고 있는지. 채워야 하는 전공학점도 아직 수없이 많이 남아 있는데, 교환학생 1년동안 챙긴 학점은 5학점이 넘지 못할 것 같다. 졸업이나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 이런저런 생각이, 자꾸만 나로 하여금 '1년을 버렸다'고 괴로워하게 만든다. 정말 나는 1년을 버려버린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안다.

막상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이 시절을 그리워할 거다.


여름, 내 방 창문을 열면 보이던 저녁 풍경. 밤 10시까지도 해가 지지 않았다.


다시 여름, 정동향의 13층 기숙사는 아침 6시만 되면 이런 햇빛으로 나를 깨웠다. 블라인드를 뚫고.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고 난 뒤 일상처럼 산책했던 뒷동산. 


플랫 부엌에서 본 Wilhelmstraße. 비가 오고 난 후라 무지개가 떠 있다.


튀빙엔에서의 소울 푸드 하오스박스. 지난학기엔 Alte Burse에서 스피노자 수업을 들어야 하는 금요일마다 이걸 사 먹었다.


그리고 얘기하겠지. 그 때 재밌지 않았냐고. 고등학교때처럼, 지나고 나면 우울했던 기억은 힘들어도 이겨냈던 기억으로 미화되어있을 것이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을 수없이 많이 되풀이하며 계속 그 기억을 더욱 더 미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그래. 아마 이 겨울도 버틸 수 있을 거다. 곧 크리스마스니까. 독일사람들도 이 겨울은 우울했는지 크리스마스만 바라보고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 곳의 크리스마스는 12월 1일부터 시즌이란다. 크리스마스라고 2주 방학도 준다.

이런 문화를 신기해했더니 AG 학생들이 내게 Adventkalender를 선물로 줬다. 12월 1일부터 아마도 31일까지, 예를들면 1일엔 1이, 2일엔 2가, .... 25일엔 25가 써 있는 문을 열어 초콜릿을 꺼내 먹는 달력이다. 


나한테 한국어 숙제 도움받는 한국학과 새내기들 세 명이 갹출해서 사 준 거다... 귀여워ㅠ... 


이것 봐라, 아직 따뜻하지 않으냐 허튼아. 90일이면 세 달이고, 크리스마스 휴가 끝나면 금방 지날거다. 당장 다음주 발표만 끝나도 아마 그 다음부턴 괜찮을 거다.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발표준비부터 천천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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