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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파르지팔> 본문

오페라, 클래식

2012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파르지팔>

허튼 2019. 7. 8. 00:48

 

지휘: 필립 조르당

연출: 슈테판 헤어하임

출연: 부르크하르트 프리츠(파르지팔), 연광철(구르네만츠), 수잔 맥린(쿤드리), 데틀레프 로스(암포르타스), 토마스 제사트코(클링조르) 

 

  그 유명한 헤어하임 연출의 2008-2012 바이로이트 <파르지팔>. 5월에 봤는데 이제서야 후기를 쓴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정리가 안 되고 사실 <파르지팔>을 이 연출로 처음 봐서 더 혼란의 도가니였기 때문이다. 헤어하임 연출로 그 작품을 처음 본다는 것.. 그런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임을 이번에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후기는 중구난방. 글에 서본결이나 일관성이 없더라도 그냥 봐주세요, 헤어하임 연출을 한큐에 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진작에 비평가 했겠지.

 

 

  이번 학기에 벤야민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날 사로잡았던 생각이 바로 벤야민적 의미에서 비평가 또는 역사적 유물론자의 역할이 헤어하임이나 오페라에서의 레지테아터 연출가와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라 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벤야민의 그 치열한 혁명적 사상을 오페라라는 부르주아 문화에 갖다붙이면서 써먹는 게 참 안좋은 일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떨치기 힘들어서 결국 기말레포트를 이 주제로 써버렸다.ㅠㅠ 주제 바꿀걸...

 

  아무튼 이런 생각을 들게 한 원인은 헤어하임 연출의 가장 큰 특징인 '시간의 재구성 또는 역사의 집약'과 '수용사(Rezeptionsgeschichte)에 대한 관심'이었다. 헤어하임의 연출에서는 항상 시간이 문제가 된다. 내가 본 헤어하임 작품들이 아직 몇 개 없어서 확언하기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의 연출들에서는 시간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고, 그 다층적인 시간들 속에서 작품의 (원)작가와 원작을 수용해 재탄생시킨 오페라의 작곡가가 종종 그 작품의 주인공으로 변모한다. <호프만의 이야기(2015 연출)>가 그랬고, <스페이드의 여왕(2016/2019 연출)>이 그랬다. 그 밖에도 <예브게니 오네긴 (2012년 연출)>에서처럼 러시아의 역사적 상징물들을 유리온실이라는 회상의 공간에 집약시켜 <오네긴>이라는 작품이 위치해 있는 시간을 뒤섞어버리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헤어하임 자신의 연출론에서 한 오페라 작품의 수용사를 그 작품 안에서 다시 풀어내는 행위는 곧 벤야민적 의미에서의 작품의 자기 구원이 된다. 비평가로서의 연출가, 그리고 비평-연출로 구원되는 과거 또는 작품. 다음의 인터뷰에서 잘 드러나듯이 말이다.

 

  “‘레지테아터’는 어리석은 개념입니다. 연출이 없는 공연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 개념과 함께 공명하는 비판[이 비판은 Werktreue(작품에의 충실함)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다]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를] 정당화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 제 연출팀은 ‘다시 기록하기 palimpsestisch vorzugehen’를 시도합니다. 이는 수많은 실들로 양탄자를 짜는 일이지요. 다의성은 음악, 특히 오페라의 본질을 이룹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 항상 그 스스로를 다시금 새로이 구원해야만 하는 예술작품입니다.” (헤어하임, 2011. 04. 11. Frankfurter Allgemein과의 인터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바이로이트 대축제극장에서 공연되었던 헤어하임 연출의 <파르지팔>에는 역사의 집약이라는 성격과 수용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성격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이 연출에는 시간이 두 개의 차원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신화의 시대, 그리고 영상과 코러스를 활용하여 1차대전 시기와 나치당 집권기 그리고 서독의 의회를 보여줌으로써 분단 독일까지의 근현대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저택인 ‘빌라 반프리트’가 1막의 배경으로 활용되고 리처드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의 자식들을 상기시키는 어린 배우들을 무대 위에 등장시킴으로써 작품의 저자를 작품 속으로 개입시킨다. 이 두 가지 시간의 차원은 공연의 마지막에 이르러 거울을 통해 극장 안에 있는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들이면서 현재의 시간과 병존하게 된다.

  헤어하임은 이 <파르지팔> 연출에서 공식적으로 벤야민을 염두에 두었다. 수용사를 문제삼는다는 것도 그렇고, 작품의 자기 구원을 시도한다는 것도 그렇고, 역사/작품을 구성하는 사람 또는 비평가로서 연출가와 지휘자를 강조한다는 점도 그렇지만, 특히 이 연출에 벤야민이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연출의 주요 모티프가 되는 새의 날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작품의 주요 인물들(구르네만츠, 쿤드리, 클링조르와 몇 명의 코러스들)은 1막에서 검은 날개를 등에 부착하고 등장한다. 이 날개는 <파르지팔>의 배경이 되는 몬살바트의 백조, 나치당과 독일연방의 국조(國鳥)인 독수리, 신으로부터 구원의 매개체이자 극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비둘기 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해당 공연의 드라마투르그인 알렉산더 마이어-되르첸바흐는 이 날개가 무엇보다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무대 위에는 바그너의 무덤이자 파국을 시각화한 벽돌 탑이 있으며, 주요 인물들은 이 벽돌탑을 무너뜨리고 새로 쌓기를 반복한다. <파르지팔> 속 역사의 천사는 바그너의 작품이 후대에 수용 및 오용되었던 파국을 돌아본다. 그리고 연출가는 이 수용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나치당 집권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나치당 휘하에 편입되고 바그너의 작품들이 나치 프로파간다에 사용되었던 역사, <파르지팔>의 중심 모티브인 ‘순수함’과 ‘구원’이라는 개념 독일의 근현대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없이 많이 사용되고 오용되어 온 역사. 이 수용과 오용의 역사를 짚고 그 일련의 연속성을 중단하겠다는 의도이다.

 

  그렇다면 헤어하임은 어떻게 벤야민의 사상과 함께 이 다시쓰기의 작업을 행하고 있는가? 헤어하임의 <파르지팔>과 벤야민이 공유하고 있는 주제를 세 개로 추려보면 다음의 키워드들이 나온다. 1) 신화의 탈신화화, 2) 구원의 변증법, 3) 도취에서 깨어나기.

 

 

1. 신화의 탈신화화 – 바그너의 신화와 독일 근현대사

1) “죽을 때까지 충실하라 Treu bis zum Tod”: 성찬예식과 민족주의의 혼합

  처음으로 흥미롭게 포착한 장면은 암포르타스와 성배 기사단의 성찬 장면이다. 성찬 장면 직전에 구르네만츠는 '연민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을 성배가 있는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가면서 "여기에서 시간은 공간이 된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고 말하는데, 이 때부터 독일의 근현대사, 더욱 정확히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시간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역사의 저속촬영기처럼 무대의 뒷편으로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영상이 빨리 감겨 영사되며, 성배의 기사들은 1차대전기의 독일 군복을 입고 등장한다. '시간의 공간화'. 벤야민의 개념들을 빌리자면, 구르네만츠와 파르지팔은 지금시간으로 가득 찬 과거, 즉 독일의 근현대사 속으로 "호랑이의 도약 Tigersprung"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역사의 구원을 위함이고, 작품의 구원을 위함이다.

  이 장면에서 성배의 기사들-1차대전의 독일군들은 암포르타스로부터 빵을 나누어 받고 포도주를 마시며 "죽을 때까지 충실할 것", "형제의 우애로 기뻐하며 이 포도주를 생명의 피로 바꿀 것", "성스러운 용기로 싸울 것"을 맹세한다. 이 때 '충실함 Treu'이라는 개념은 참 어려운 개념이다. Treu는 신의있음, 충직함, 충성스러움, 신실함, 성실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특히 미덕으로 요구되는 가치이다. 1500년대부터, 특히 19세기에 드디어 단일민족국가로서 통일로 다가가는 독일 안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 '독일적 deutsch'이라는 단어 뒤에 독일 민족의 신체적/정서적 우수함을 강조하는 긍정적 단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Treu는 그 때 붙은 단어의 대표적 예시이기도 하다. '독일인의 충실함'. 누구에게? 가족에게, 민족에게, 나라에게,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지도자에게, 총통에게.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고 포도주를 생명의 피로 바꾼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와 신의와 우애와 성스러운 전쟁! 와 이거 완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아니냐? 그래서 헤어하임은 바로 이 성스러운 성찬예식과 만찬을 1차대전과 연결시킨다. 바그너가 그려내고자 했던 독일 민족의 신화는 헤어하임의 연출을 통해 그 신화를 전쟁에 사용하고자 했던 오염된 역사를 곧바로 지목하게 된다. 

 

2) 스타 숭배와 꽃처녀들

  사실 2막이 진짜 너무 어렵다. 하나도 모르겠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1막에서 1차대전기가 지나갔으니, 2막에서는 전후 독일의 슈퍼인플레와 영화산업, 그리고 나치 시대가 등장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제 순수한 바보, 금발의 백인 아리아인을 유혹하는 것은 무엇보다 영화와 스타 산업이다. 그 유혹의 진행과정 끝에는 기나긴 쿤드리와의 갈등과 함께 나치가 있다. 

  글쎄 모든 인터뷰와 후기들이 2막에서 클링조르와 쿤드리의 분장은 1930년대의 영화계 대스타 마를렌 디트리히를 지목하고 그들이 등에 달고 나오는 파란색 날개는 디트리히의 매끈한 다리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놓은 영화 <푸른 천사 Der Blaue Engel>을 상징한다고 하니까 여기에 태클을 걸 수는 없겠지만..  생각해보면 마를렌 디트리히랑 푸른천사 원작자인 하인리히 만이 억울해서 울겠음. 이사람들은 나치를 증오했는데 어째서 이들이 유혹적인 영화 매체의 최첨단에 서 있는지? 그리고 영원한 유대인 아하스버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캐릭터 쿤드리나 유대인 악마화의 전형으로 수용되어온 캐릭터 클링조르에게 나치를 입히는 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한단 말인가요..

  어쨌든 영화는 2막의 초반에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파르지팔이 자신의 성으로 오며 자신의 병사들을 죽이는 것을 바라보는 클링조르의 뒤로 계속해서 필름 영사기가 회전한다. 어린 파르지팔은 사람 모양으로 깎은 나무 인형을 서로 부딪히고, 칼을 들어 병사들을 찌른다. 앞서 1차대전에서 부상입었던 병사들은 이 칼질에 전부 쓰러지고 만다. 영사기는 계속해서 회전하고, 클링조르는 여전히 마를렌 디트리히다. 파르지팔이 클링조르의 탑에 다 올라오면 꽃처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메트로폴리스>의 환락적 여자들을 닮아 있다. 엔터테인먼트와 집단적 충격체험. 정신분산. 아우라의 붕괴. <파르지팔>의 신화는 영화매체의 개입으로 탈신화화된다. 그렇게 헤어하임은 클링조르의 이 마적인 장면에서 독일의 영화황금기를 집약시켜 보여준다.

 

 

2. 구원의 변증법 - <파르지팔>의 구원자 ‘파르지팔’

  “구원자에게 구원을! Erlösung dem Erlöser!” <파르지팔>은 이처럼 난해한 말과 함께 끝난다. 바그너는 이 작품 속에 예수를 상기시키는 인물을 두 명 배치했는데, 바로 암포르타스와 파르지팔이다. 그리고 1막부터 어린 파르지팔이라는 추가된 캐릭터를 통해 암시되는 바와 같이 이 둘은 다르지만 같은 인물이다. 

  예수의 형상을 한 암포르타스를 메시아 파르지팔이 죽임으로써 구원한다. 그렇다면 암포르타스는 작품 <파르지팔>이 수용되고, 오용되었던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까? 암포르타스가 성찬 장면에서 병사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는 행위는 <파르지팔>이 민족주의에 부합해 그들의 프로파간다로 쓰였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수용으로 인해 상처입은 암포르타스는 새로운 수용을 상징하는 파르지팔을 통해서만 치유(또는 죽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3막의 서독 의회에서 암포르타스가 이제는 죽고싶다고 한 것은 <파르지팔>의 새로운 수용에의 요구일 것이다. 파르지팔이 2막의 마지막에 클링조르-나치에게서 가져온 성창은 이제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을 오수용으로부터 구원한다.

  그 시작은 2막 마지막의 쿤드리다. 나는 여기서부터 아예 미궁에 빠져버렸다..... 단지 단편적인 단서들만이 머릿속을 떠도는데 몇 가지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연민을 통해 Durch Mitleid wissend" 깨달음을 얻는다는 파르지팔에 대한 예언에서, 연민은 Mit-Leiden, 곧 함께 고통받는다는 단어를 뜻한다. 파르지팔은 2막에서 어머니인 헤어체라이데를 연기하는 쿤드리에게 성적 유혹을 당하는데, 이 때 헤어하임은 쿤드리에게 암포르타스와 똑같은 상처를 부여한다. 성창으로 인한 옆구리의 상처를 말이다. 파르지팔은 자신을 구원해달라는 유사 암포르타스 쿤드리를 뿌리치고, 나치로부터 성창을 다시 빼앗아온다.  3막에서 비로소 몬살바트로 가기 전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마치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듯 그 죄를 사하여 준다. 헤어하임 연출에서 암포르타스는 살아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장면까지 독일 국기와 티투렐의 관에 그의 몸의 절반을 담고 죽어있다. 오히려 쿤드리가 구원받아 살아남는다. 그녀의 자연사가 없어지고, 대신 미래를 향하는 그녀의 시선이 남는다. 난 정말 모르겠어 헤어하임.. 주석서 하나만 내 줘..

 

3. ‘도취’에서 깨어나기 – 거울 이미지

 마지막 장면은 특히 재미있다. 이 프로덕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이다. 암포르타스를 성창으로 구원한 파르지팔은 지금까지 성배를 보관하던 곳, 우물, 의회 연단 등으로 활용되었던 중앙의 둥근 공간 아래로 사라진다. (물은 예로부터 자궁과 깊은 관련이 있는 상징물이다. 결국 그 앞의 침대, 쿤드리/헤어체라이데의 유혹과 결부될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성배는 그러므로 재생산을 의미한다.) 그 앞에는 독일의 국기로 싸여 있는 티투렐의 관이 있고, 암포르타스는 티투렐의 관을 끌어안고 쓰러진다. 쓰러진 암포르타스는 그 관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그 앞에는 바그너의 무덤과 벽돌담이 있는데, 그 위에 구르네만츠, 쿤드리, 어린 파르지팔이 정면을 보고 선다. 얼핏 정상가족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잃고 폐허에서 돌아온 것 같은 동양인 가수의 구르네만츠와 애초부터 '영원한 유대인'의 모티프로 만들어진 캐릭터 쿤드리가 어린 파르지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미래를 향한다는 점은 제법 인상적이다. (미래를 만들어갈 금발의 푸른눈 아리안 정상가족을 내세울 리가 없지 않겠느냐마는..) 그들의 뒤로 거울이 떠오른다. 중앙의 둥근 공간과 그곳에 그려져 있던 독수리를 비추던 거울의 반영물은 천천히 하강하고, 새로운 반영물로 관객이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불쾌함이 있다. 바그너의 민족주의적 작품들에서 나치 프로파간다와 합치되는 지점을 발견하였던 비니프리트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를 나치당 휘하에 편입시켰다. 전후 약 6년간 나치청산의 여파로 음악축제와 대축제극장의 운영은 미미했으나, 1951년부터 재개되어 현재는 매 년 진행되고 있으며 음악축제의 관리권은 여전히 바그너의 후손들에게 전승되고 있다. 여기서 연좌제를 가져오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와 대축제극장이라는 공간에서, <파르지팔>에 담긴 민족주의의 신화화 과정 전체를 성육신인 암포르타스-예수의 쓰러진 육신에 담아 ‘지는 해’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고 그 후 ‘떠오르는 해’로서 관객을 제시해주는 것은 실상 안일한 해결방책이 아닌가? 바그너 작품과 바이로이트의 나치 부역 역사를 왜 바이로이트 자신이 구원하고 용서하고 다음 세대의 역할을 지정해주고 있느냔 거다. 더욱이 유럽에서 오페라가 아무리 ‘대중적’인 문화라 한들, 언제나 매진 행렬을 이어가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의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은 혁명을 일으킬 노동자 계급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 계급에 가깝지 않을까? (2008년 이 공연이 초연되었을 때 야유가 아닌 환호가 객석을 메웠다는 사실은 이런 의문을 더욱 강화시키지 않나?) 이는 결국 “지배계급의 명령 하에 있는 아레나”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인용 유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를 의식하듯 헤어하임은 한 가지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관객을 비추는 거울에는 무대와 객석 사이 오케스트라 피트의 지휘자 역시 함께 반영된다. 정면에서 무대를 바라보면 오히려 지휘자가 관객 시선의 정중앙에 있게 되는 셈이다. 지휘자를 기준으로 위에는 관객들이, 아래에는 무대 위의 바그너 무덤과 (어린)파르지팔, 구르네만츠, 쿤드리가 있다. 이 때 관객도 인물들도 정지상태에 있지만 지휘자만큼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위해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본래 바그너의 의도대로라면 <파르지팔>의 가장 웅장한, 구원의 순간이자 신화화의 정점인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성배가 빛나며 둥근 천장에서 비둘기가 날아와 파르지팔의 머리 위를” 맴돌아야 한다. 이 때 비둘기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독교적 의미에서 신의 성령을 지상으로 전달하는 매체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헤어하임의 연출에서는 신의 전령이자 중간자인 비둘기 대신 흰 옷을 입은 지휘자를 내세운다. <파르지팔>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대상이자 예술작품이라는 ‘단자’를 현재 시대에 재맥락화하는 행위가 지휘자를 통해 전면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작품과 관객 사이의 매체로서 공연의 감독-비평가의 역할이 드러나는 것이다.

 

  <파르지팔>의 공연에서 지휘자를 관객에게 직접 제시한다는 것은 바그너의 신화화 작업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 행위이다. 바그너는 어떠한 경우에도 작품의 환상성, 즉 관객이 극 안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그 환상성을 깨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바이로이트 대축제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를 보통의 다른 극장들보다 훨씬 깊게 설계했다. 객석에 앉으면 지휘자와 일부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보이는 다른 극장들과는 달리 대축제극장은 철저히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숨긴다. 공연을 만들어가는 제작자들을 무대 아래에 숨김으로써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신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닫힌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거울 장면은 가장 열광적인 도취가 일어나는 구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면으로 그 환상을 깨버린다. 이 공연 또한 하나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새로운 수용사는 새로운 신화가 되어서는 안 되고, 언제든 다시 해체되었다가 다시 구성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헤어하임은 이런 식으로 보여준다.

 

 

  노르웨이 출신 연출가 헤어하임은 이런 방법으로 독일 근현대사를 짚어가며 <파르지팔>의 수용사를 다시 쓴다. 더불어 홀로코스트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바그너의 나치청산을 시도하여 바이로이트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도발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내게 아직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너무 재수없고 점잖다. 죽은 토끼의 부패과정이나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거지 대왕정도는 그려내야 탈신화화의 느낌이 나는데, 헤어하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신화로 돌아온다. 그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점잖은 논쟁화가 헤어하임의 방식이기도 하고, 꼭 충격적인 이미지를 눈 앞에 보여줘야지만 훌륭한 도발이자 논쟁적 연출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헤어하임의 연출은 꼭 헤어하임이 극 뒤에서 엣헴 하고 뒷짐지고 서 있을 것만 같다. 이 파르지팔은 특히 더 그렇다. 아 이거 또 연출 제대로 이해 못하고 쓰는 선입견인가 그럴수도 있을 것 같네..

  아무튼 헤어하임은 앞으로 베를린에서 링사이클을 올리고, 2022년에는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예술총감독을 맡는다고 한다. 헤어하임의 반지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두렵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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