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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국립오페라단 <윌리엄 텔> 본문

오페라, 클래식

2019 국립오페라단 <윌리엄 텔>

허튼 2019. 5. 13. 12:00

2019. 05. 10 공연.

 

지휘: 제바스티안 랑 레싱

연출: 베라 네미로바

출연: 김동원(윌리엄 텔), 강요셉(아르놀드), 세레나 파르노키아(마틸드), 김요한(멜크탈), 백재은(헤트비히), 라우라 타툴레스쿠(제미), 김철준(발터 퓌어스트), 전태현(게슬러)

 

 

  상처뿐인 공연.. 이걸 2019년 한국에서 봐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공연을 볼 때마다 이 이야기가 지금 여기 이 무대와 이 인원과 이 자본을 들여 올라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한다. 단순한 드라마/오페라 텍스트의 재현은 이제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 공연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국립에서 만든 공연이라고 홍보할 때부터 알아서 걸렀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다.

 

  아니 근데 정말 내 잘못일까?? 내가 실러를 사랑하고 이 작품은 실러의 <빌헬름 텔>을 원작으로 하는데 안 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리고 나는 애초에 로시니부터가 원작의 가치를 이렇게나 훼손했을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보러 가기 전에 다른 프로덕션이라도, 아니 대본이라도 미리 읽고 갈 걸. ㅠㅠ 아 내가 원작못잃어충이 되다니!!!!!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이유를 붙이고 싫었던 것은 웬만하면 말하지 말자고 항상 항상 다짐하지만 언제나 이 다짐은 깨지고 만다.. 대체 뭐가 이렇게 불만이었을까. 이유를 두 가지만 대보자.

 

1. 원작과 한참 멀어진 로시니

  난 진짜 몰랐다. <기욤 텔> 처음 보는데 너무 슬펐다. 텔이 이렇게 처음부터 혁명충일 줄 몰랐다. 우리 실러는 이런 거 안썼다...ㅠㅠ 실러의 <빌헬름 텔>이 왜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을까? 바로 텔이 행동을 망설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러의 주인공 텔은 처음에는 목가적이고 소박한 인물이다. 가족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면 오스트리아가 압제를 하든 스위스 자치를 하든 괜찮다는 인물이다. 다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정의로움은 살아있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세 주의 연합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텔은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스위스 연맹의 집단봉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집단봉기 불참은 사과를 쏘고 나서도 계속되며, 드라마 끝까지 그렇다. 가족이 위협받자 결국 텔은 게슬러를 죽이고, 그 결과로 스위스 연맹은 무혈 봉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스위스의 독립을 성공케 한 텔의 게슬러 살해는 영웅적 행위도 당당한 자기방어도 아니고, 단지 숲길에서의 암살에 불과하다. 텔은 게슬러를 암살하기 직전 수많은 지면과 시행을 소비해가며 망설인다. 게슬러가 죽어 스위스가 압제에서 풀려났음에도 텔은 자신이 암살을 했다는 사실에 떳떳하지 못하고 연맹 사람들과 함께 기뻐할 수 없다. 텔의 이런 망설임은 실은 실러의 완결된 드라마 9편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는 폭력에의 회의와 다르지 않다. 이런 회의는 실러가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던 바로 그 단계에서 프랑스 혁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중심 문제의식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 저항자의 폭력에 대한 고민과 그 폭력으로 얻은 자유에 대한 회의가 실러를 현대에도 가치있게 하는 고민 아니었을까?

  그런데 로시니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기욤 텔>의 텔은 처음부터 스위스 연맹의 선두에 서 있다. 모든 행동을 이끄는 영웅적인 인물이고, 굉장히 일관적이다.(연출 노트에는 텔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모두 이중적인 면을 가진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드는 이유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도외시하는 텔'은 내게는 오히려 텔이라는 인물의 일관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점으로 보인다.) 실러의 텔은 적어도 변화하는 인물이다. 초반의 나이브한 상태에서 게슬러의 말도 안되는 내기에 격정을 겪고, 이후 게슬러를 암살한 뒤 텔의 집에 찾아온 파리치다를 훈계하며 숭고한 인물이 된다.  나는 <기욤 텔> 서곡이 4단계로 고조되길래 로시니의 텔도 그에 걸맞는 인격적인 변화를 겪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인 주인공이라니, 다 떠나서 러닝타임이 장장 4시간인데 이런 인물로 4시간을 끌고가면 정말 엄청나게 재미가 없지 않을까?

 

2. 시의성의 부재와 안일한 연출

  이런 주인공을 데리고 심지어 연출에는 그 어떤 도발도 없다. 텍스트에 철저히 충실한 연출. 의상만이 1910-20년대 어딘가를 지목하고 있다. 한국이 지금 아직도 일제강점기면 이런 공연 올라오는 거 당연히 의미있을 거다. 아니면 적어도 게슬러와 오스트리아 제국 일당을 현재 한국의 청산 못한 친일 후손들로 보이게 하는 어떤 자그마한 장치라도 있었어야 했다. 그것이 너무 민감한 주제라면 아주 식상하지만 적어도 현재 의미 있는 주제들, 예를 들면 자본가, 미국, 정상성이라고 대표되는 이미지들은 어떤가. 게슬러는 상징적 인물이다. 자신이 내린 명령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을 보며 손을 떨고 겁을 먹는 '인간'이 아니라. 

  자유가 이렇게 쉽게 얻어지는것이었던가? 이렇게 청순하게 자유를 노래하면 남는 건 대체 뭔가? 지독하게 애국정신을 부르짖고 있지만 이건 정치의 미학화에 다름아니다. 완전 보수 이데올로기의 결정체 아니냐고.

  그리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희화화한 것. 폭력 연출이 끔찍했다는 평이 많은데, 여성을 향한 폭력이 직접적이고 보기 거북한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폭력이 희화화된 것이 훨씬 더 큰 문제다. 여성 연출가인데 이럴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 백인이 백인했던 것인지 여성 강간 장면에서 싸이 말춤을 추고 앉았다.  웩.

 

 

  금요일에 본 공연인데 하필 바로 전 날 목요일에 헤어하임의 개띵연출 2012년 <파르지팔>을 봤었다. 너무너무 비교되고 쪽팔린다. 헤어하임의 <파르지팔>도 어느 정도 보수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조금 짜증나기까지 했다), 같은 역사의 재구성으로서 원작에 대한 비전통적인 연출일지라도 이렇게나 다른 결과를 낸다. 4시간짜리 애국심 고무/고문은 정말 지옥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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