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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레지덴츠 테아터 <군도> - Ulrich Rasche의 Chortheater와 실러 본문

연극, 뮤지컬

2017 레지덴츠 테아터 <군도> - Ulrich Rasche의 Chortheater와 실러

허튼 2018. 7. 21. 12:35

연출: 울리히 라셰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 실러가 <메시나의 신부>를 완성했던 1803년에도, 아니 아마 인간의 미적교육에 대한 편지를 쓰던 1790년 중반에도 이미 근대의 징후들은 도시를 떠돌고 있었다. 실러는 말년에 아픈 몸으로 이사를 하겠답시고 베를린을 며칠간 돌아보았던 것 외에는 평생동안 소도시에 머물렀던 사람이지만 그의 시각만은 저 멀리까지도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었나 보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국가라는)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분열하는 인간이 그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그 미래의 시대를 살아갈 인간에 대한 실러의 이해였다.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 브레히트가 그 시의 제목을 이렇게 써먹으라고 붙여둔 건 아닐 테지만 여튼간 실러가 본 그의 시대도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였다.

  실러는 그래서 고대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그가 살았던 '현대'에 다시 불러왔다. 현대가 산문이라면 고대에서 서정성을 빌려오면 될 것이 아닌가. 그가 죽기 2년 전 완성하여 출판 및 초연을 올린 <메시나의 신부>는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빌헬름 텔> 바로 직전의 작품이자, 그가 고대 그리스인과 한 판 "겨루어" 보고자 했던 작품이고, 고대 그리스의 형식을 차용하여 무대 위에 코러스를 구현한 작품이다. 평단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실러의 드라마 중에서는 가장 적게 성공한 작품이기도 하다. 고대로의 회귀를 퇴보로 보는 평단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이 작품의 서문 격으로 쓴 논문이 바로 <비극에서 코러스의 활용에 관하여>라는 글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고대 그리스를 이상 사회로 못박아두고는 영원히 이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했다. 분열이 없는 완전한 세상. 단순하고 아름다운 사회. 실제로 그랬는지 어땠는지 실러를 비롯한 18세기 문사철 깡패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사회에서 코러스는 신에게 바치는 제의로서, 감정을 증폭시키고 무대 위의 주인공을 평가하는 군중으로서 존재했다. 고대의 코러스는 무대 위에서 자연스로운 존재였다. 고대 사람들은 삶 자체가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연극의 제의적 기능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연극의 시발점을 환기해주던 코러스는 점점 무대 위에서 사라져갔다. 실러의 시대에는 무대 위에 완전히 현실적이거나 완전히 환상적인 소재만이 남았다. 둘 다 실러의 연극 이념에는 맞지 않았다.


  "왕들의 궁성은 이제 모두 닫혀 있다. 법정은 도시의 커다란 성문에서 가정집의 내실로 물러났다. 집필에서는 생생한 단어를 몰아냈다. 신중하게 살아가는 대중인 국민 자신은 거친 폭력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사치스런 허세가 되어 결국 빛바랜 개념으로 퇴색하고 말았다. 신들은 다시 인간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작가는 궁전을 다시 열어야 하고 법정을 자유로운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작가는 신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현실적인 삶을 임의적으로 설계함으로써 폐기되어 있는 모든 절실한 사안들을 다시 창조해 내야 한다."

* 이재진 역


  그렇기 때문에 실러는 코러스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무대 위에 존재했던 코러스를, 실러는 그의 현대에 인위적인 예술로서 투입한다. 명명백백히 가상인 연극 무대 위에, 그 가상성과 환상성을 유지하면서도 진지함을 가지고 현실의 문제들을 불러오기 위해서. 우리 삶의 물질적인 문제들을 실러는 예술 안에서 이념적인 것을 통해 해결하길 원했다. 이게 무슨 개똥같은 생각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실러가 생각한 현대의 코러스는 두 가지 역할을 가진다. 연극을 서정과 격동이 난무하는 가상으로 만들기, 그러면서도(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관객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코러스는 코러스 자체가 하나의 인물처럼 행동하여 개인적 이해를 가지거나, 하나의 거대한 대중으로 변모하여 집단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경향성과 집단의 이성 사이에서 균형있게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소재충동과 형식충동, 감성과 이성, 감정과 성찰. 언제나 실러는 둘 다를 잡아야 한다고 욕심을 낸다.


  페터 안드레 알트는 <메시나의 신부>의 서문으로 붙은 이 글의 논지와 작품 자체의 연결고리가 헐겁다는 것을 지적한다. 작품 완성 사후 쓰인 이 논문은 작품을 변호하고 있기는 하지만, 작품에 나타난 코러스의 성격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기보다는 실러의 연극 이념과 코러스 미학 일반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 <메시나의 신부>에서 코러스는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명령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집단의 이성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실러가 위 논문에서 주장했던 균형과는 많이 다르고 오히려 혼란에 빠진 코러스의 다의성이 <메시나의 신부> 속 코러스가 우리 시대의 현대적 의의를 담고 있다고 알트는 설명한다.


  실러가 논문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코러스의 이상은 오히려 2017년 뮌헨 레지덴츠테아터에서 올라온 울리히 라셰(Ulrich Rasche) 연출의 <군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앗음.. 네... 이 얘기 쓰려고 서론을 구질구질하게 늘여놓은 것입니다...

  <군도>는 실러가 23살 때 처음 익명출판한 작품으로, 당시 독일 청년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실러가 군도의 작가였기 때문에 그는 극작가로서 유명해질 수 있었고, 실러가 군도의 작가였기 때문에 도망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실러가 군도의 작가였기 때문에 괴테는 처음에 그를 얕보았으며 실러가 군도의 작가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혁명 이후 명예 시민 호칭을 부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도>는 때늦은 질풍노도(폭풍우와 돌진, 슈투름 운트 드랑.. 뭐든)의 작품이었다. 격정적인 언어, 비속어, 휘몰아치는 감정, 집단강간의 끔찍한 묘사, 강도질과 살인, 살인, 살인! 그 어느 면에서도 실러가 20년 뒤 쓰게 된 고전주의 비극에서 코러스의 사용 따위의 징후를 찾아볼 수 없다. 대사들은 전부 산문이며 운율도 없다. 코러스같은 고대 유물은 당연히 없다. 그런 젊은 작품을 울리히 라셰는 각색하여 코러스 연극으로 무대 위에 올렸다. 산문으로 쓰인 대본의 운율을 살려서, 거기에 음악을 입혀서. 2017년에.




  무대 위에는 두 개의 거대한 러닝머신이 있다. 이 Laufband는 공연 내내 끊임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무대 위에 있는 모든 배우들(코러스 포함)은 끊임없이 서로 비슷한 보폭으로 걸어야만 한다. 기계는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쏠릴 수 있어서 자체적으로 경사를 만들어낸다. 두 개의 기계는 서로 교차될 수도 있다. 심한 경사에서 있을 수 있는 추락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획득하면서도 모두 그 기계(죽음으로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 매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도록 배우들은 기계의 중앙에 와이어를 걸 수 있다. 무대와 의상은 끔찍하게 어두우며, 가장 큰 광원은 무대 뒤에서 쏘는 하얗거나 주황색이거나 빨간색의 조명이다. 주인공인 프란츠의 런닝, 카를의 셔츠 그리고 비중이 크진 않지만 중요한 인물인 아말리아의 드레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물의 의상이 검은색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다니엘 역시도 흰 셔츠를 입고 있긴 한데, 극중 인물 중 양심을 가지고 있는 드문 사람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연출에서 코러스는 카를의 도적떼로서 등장한다. 극중 코러스의 주된 역할은 카를을 압박하는 것이다. 카를이 목가적인 가정으로 회귀하는 것을 막는 어떤 거대한 것. 이것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운명'일 수도 있겠지만, 실러였다면 운명 운운은 자신을 오독한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형식은 지극히 고전주의의 것이지만 소재는 지극히 질풍노도의 것이기에 이 코러스는 '폭풍우와 돌진'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카를은 코러스에 휩쓸려 도적이자 살인자가 된다. 슈피겔베르크의 선동 이후 도적 떼는 카를을 부추기며 다음과 같은 대사를 운율에 맞춰 반복한다. "Du sollst unser Hauptmann sein. Du musst unser Hauptmann sein! Räuber und Mörder! - So wahr meine Seele lebt, es lebe der Hauptmann! (당신은 우리의 두목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우리의 두목이 되어야만 한다! 강도와 살인자! - 내 영혼이 살아있는 한, 두목 만세!)" 도적이자 살인자가 된 카를은 연극의 마지막에서 코러스에 의해 평가되기도 한다. 연극은 코러스의 메아리같은 질문 "Hauptmann, Hauptmann! Was machst du? Bist du wahnsinnig worden?(두목, 두목! 무슨 짓이오? 미쳤소?)"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라셰는 운율이 없는 산문 대사에 운율을 부여하기 위해서 대사를 최대한 한 가지 음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이는 현대적 Chortheater의 선구자(?) Einar Schleef가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높낮이를 최대한 평이하게, 감정이 실려 있지만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것 같지는 않게,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도 우리는 이 극을 통해 현실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자유와 죽음을 접할 수 있다. 독일어가 짧아서 라셰의 인터뷰들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가 연출한 작품들과 무대들로 미루어보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금속질의 차가운 죽음이라는 흐름 위를 인간은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 모든 결말은 죽음이겠지만 그 위에서 여러 모습의 인간들은 여러 행위를 하고 여러 서사를 만들어낸다. 코러스는 관객을 압도하고 극장을 꽉 메워 연극의 환상성을 극대화시킨다. 여러 사람이 배에서부터 끌어올려 반복하는 대사들은 머리를 울리고 감정을 격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다. 현실에서는 저런 광경을 찾을 수 없다. 굴곡없이 외치는 대사와 운율은 우리를 가상에 매몰되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객석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실러의 <메시나 신부> 서문과 이 <군도> 연출은 연결될 수 없을까? 그건 내가 좀 더 공부해야 할 문제다.


  '코러스 연극' 하면 Gesellschaft와 Gemeinschaft를 구분하여 공동체적 사회에 대한 짙은 향수 또는 동경을 가지고 코러스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구별할 수 없는 상태를 열망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코러스를 관객 사이에 끼워넣어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 역시도 객석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게 한다던지 하는 것 말이다. 그런 동경은 이제 하지 말자. 우리는 게셀샤프트에 살고 있다. 그리고 게마인샤프트로 이행될 수 없다. 그러니 이에 대해서는 실러의 논문이 적절하다. 우리는 이미 고대 그리스 사회로는 갈 수 없다. 우리는 게셀샤프트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논의해야 한다.



  라셰의 연출이 재미있는 것은, 이런 끔찍한 이미지를 독일 사람인 라셰가 독일 땅에서 올린다는 점이다. 금속성의 거대한 기계에 대한 압도, 하나의 몸체를 수행하는 여러 개별체들, 기계와 하나가 된 인간, 음악의 선율과 인간의 말의 합치. 모두 이 연출의 특징이고 또한 나치 프로파간다의 특징 아니었던가? 거의 모든 근대적인 것에다 Entnazifizierung을 거치느라 독일이 예술에서의 어떤 몇몇 특성을 시도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지만, 이건 또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어쨌든 라셰는 쿠세이의 뮌헨 레지덴츠테아터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19년에도 레지에서 새로운 연출로 엘렉트라를 올릴 예정이다. 그 전에는, 이제 목전으로 다가온 2018년 짤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아이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을 올린다. 라셰는 몇 년 전부터 주로 18세기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 올린 안티고네도, 엘렉트라도 페르시아인들도 고대 그리스 연극이다. 이 전환은 그에게 무슨 의미일까? 뭐 어쨌든 3sat가 힘내서 라셰 연출의 연극들을 많이많이 방송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독일에 못 가는 게 너무 배아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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