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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뮤지컬

202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현자 나탄>

허튼 2023. 8. 10. 04:01

 

2023. 08. 07.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

 

연출: 울리히 라셰

출연: Valery Tscheplanowa(나탄), Julia Windischbauer(레햐), Nicola Mastroberardino(술탄 살라딘), Almut Zilcher(시타), Mehmet Ateşçi(신전기사) / 다야, 수도사, 대주교는 3~9명의 코러스가 맡음

 

 

  어떡해... 나... 연극 좋아하나 봐...

 

 

  모든 게 정말 갑작스럽게 진행됐다. 일요일 밤에 우연히 한 트친이 올해 잘츠에서 올라오는 쿠세이 피가로 얘기를 하고 계신 걸 봤고... 낄낄거리다가 나도 잘츠에서 뭐 하는지 궁금해져서 홈페이지에 들어갔고... 뭐?! 이번 잘츠에서 울리히 라셰 연출의 <현자 나탄>이 공연된다고?! 뭐?! 전 회차 전석 매진인데 딱! 내일 공연만! 딱! 한 자리가 남아있다고?! 뭐?! 뮌헨에서 잘츠까지는 레기오날 반 타고 2시간이면 간다고?! 당장결제갈겨. 이렇게 된 것임... (이 무계획은 다음날 내게 상당한 공포를 선사한다.)

 

  그럼 울리히 라셰가 뭐 하는 넘이냐... 나를... 코러스에 미친 놈으로 만든 장본인이자 내 대학원 라이프의 가장 첫 단추를 차지하고 있는 연출가임. 그에게 처음 눈이 돌아갔던 2018년 그시절의 글도 남아있다: https://youlamb.tistory.com/150 석사 1~2학기 때 이 인간의 <군도> 연출을 DVD로만 보고 정말 서툰 학회발표를 하고 서툰 논문을 쓰기도 했고 아무튼 독일에 와서 꼭 실제로 공연을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연출가다. 

  사실 라셰 공연은 그냥 뮌헨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볼 수 있기는 하다. 라셰의 <군도> 연출 초연 자체가 뮌헨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뭐 언젠간 다시 올라오겠지 싶기도 했고, 당장 올해 12월에는 라셰 연출의 <아가멤논>이 뮌헨 레지덴츠테아터 공연스케줄에 땅땅 못박혀 있다. 뮌헨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그냥 이 연출가의 연출작 하나쯤은 볼 수 있는 것임. 하지만? 이번에 하필이면 꼭 <현자 나탄>을 보고싶었던 이유는...

 

  이 작품이 바로 쿠세이놈이 2019년에 부르크테아터 상임으로 가면서 지 취임 첫시즌 오프닝 공연으로 올리겠다고 소문냈던 프로덕션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코러스에 미친놈인지 쿠세이에 미친놈인지. ㅋㅋ 결국 이 <나탄>은 무산되고 쿠셰 취임 첫시즌 오프닝은 라셰의 <바코스 여신도들>이 되었지만. 아무튼 이런 사유로 계획에도 없었던 잘츠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문제는... 이 공연이 인터미션 20분 포함 총 3시간 50분에... 공연 시작시간이 밤 7시 30분이었다는 것. 끝나면 밤 11시 20분이다. 그리고 이 공연은 오페라처럼 대축제극장이나 잘츠부르크 시내 어디선가 진행되는 게 아니라 잘츠부르크 시내에서 14km쯤 떨어진 웬 시골 할라인 Hallein이라는 곳에서 진행되는 거였다. (검색해보니 소금광산 체험으로 관광화된 곳이기는 했다.) 공연 1시간 전에 셔틀버스가 운행된다는 공지는 있었지만 공연이 끝나고도 셔틀을 운행해준다는 공지는 없었고 막차는 10시 반에 끊겼기에... 나는 연극을 보는 내내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한밤중에 14km를 걷는 게 좋을지, 새벽5시 첫차까지 노숙하는 것이 좋을지, 옆자리 할머니한테 혼자오셨어요? 혹시 차 타고 오셨어요? 플러팅을 날릴지 고민하며... 게다가 이 날 잘츠부르크는 8월임에도 비내리는 축축한 10도였다...

  결론은 공연 끝나고도 셔틀을 운행해 줌. 대축제극장 근처까지... 그리고 셔틀버스 기사분께 택시 필요하다고 하면 택시도 불러준다. 주 관객층이 노인분들이라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아무튼 꽤나 두려웠다. 왜냐하면 극장 자체도 뭔 축산업농장 개조한 것처럼 생겼거든요? 아래 짤 보삼... 극장은 할라인의 Perner-Insel에 있구요, 잘츠축제 즐기러 왔다가 저같이 공포에 떠시는 분이 또 계실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ㅋㅋㅋ

 

Perner-Insel 극장 사진. 출처: https://www.tennengau.com/magazin/festspiele-auf-der-pernerinsel-hier-spielt-das-leben/

 

  이제부터 공연 얘기.

  이거 보려고 급하게 이북 번역본 사서 예습함. 그런데 번역본은 산문인 거 아니겠어요? 원문은 무운시인데. 내용만 알면 되지 싶긴 해도 이 언어 형식이라는 게 특히 이 연출에서는 묘하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극작가이자 비평가로서 레싱은 인물이 말하는 언어에 굉장히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특히 레싱은 <함부르크 연극론>의 59번째 글에서 비극 주인공의 과장되고 화려한 어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고대 비극으로부터 그 언어의 무게와 수사만 가져오고, 고대 그리스 예술의 핵심인 '고귀한 단순함'은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대 비극의 언어가 화려하고 무게감 있었던 이유는 무대 위에 코러스가 있었기 때문인데, 모든 인물들이 코러스가 보는 앞에서 - 즉 공적인 자리에서 - 발화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말을 고르고 절제하고 존엄하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레싱에게 "최고의 언어 beste Worte"는 "첫 번째로 튀어나오는 언어 die erste"이지 고르고 고른 고대 비극의 언어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이미 코러스를 삭제해버린 당대의 비극 작가들이 이런 무게감 있는 언어를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코러스가 없는, 제4의 벽으로 마감되어 있는 레싱 당대의 연극무대 위에서 인물은 정동 속에 파묻혀 있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통제할 욕구나 필요가 전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1767년 11월에는 그랬던 사람이 1779년 <현자 나탄>에서는 암만 각운이 없다고 해도 행을 세심하게 나누고 약강도 분배하면서 작품을 쓴다. 왜 그런 건지 아시는 분은 알려주세요. 자연스러운 언어와 무운시는 상충하지 않는건가? 게다가 현대의 코러스 연출 전문가인 라셰가 붙으면 더 묘해진다. 라셰는 "그런 레싱의 언어가 제 작업에 큰 도움을 줍니다" 이러구 있음. 코러스 9명과 개별 인물 다섯 총 14명이 동시에 말하려면 박자가 무조건 중요해지기 때문에 이미 행이 나뉘어진 대사는 또다시 여러번 분절되고, 연극 진행에서의 강약조절이라는 걸 도대체 모르는 연출가 덕에 대사는 시종일관 강강강강세를 유지한다. 자연스러운 말과는 천만리 떨어지게 됨. 라셰 이 인간은 코러스 연출만 하면서 왜 이 작가의 이 작품을 고른 걸까? 

 

  등장인물 구도에서 출발해볼 수 있겠다. <현자 나탄>은 한 뿌리에서 갈라져서 서로 박터지게 싸우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두고 레싱이 이제 그만 싸우고 좀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인생을 좀 대국적으로 살아라 훈계하는 작품이다. 타이틀 롤인 나탄은 유대인, 술탄 살라딘과 그 여동생 시타는 무슬림, 나탄의 하녀 다야와 수도사 및 대주교는 기독교인을 대표한다. 중심 갈등에는 기독교인의 핏줄에서 난 줄 알았는데 사실 무슬림의 아들이었던 신전기사와, 유대인의 핏줄에서 난 줄 알았는데 사실 기독교인의 딸이었던 레햐의 러브스토리가 있다. 게다가 둘이 남매! 레햐의 출생의 비밀은 극중에서 큰 반전처럼 다루어지지만 이미 작품 맨 첫번째 장 인물소개에 "입양된 딸"이라고 적혀 있음. 

  이렇게 설정된 인물구도를 연출가는 유대인은 한 명(나탄), 무슬림은 두 명(살라딘, 시타), 기독교인은 코러스(다야, 수도사, 대주교의 대사는 대부분 세 명의 코러스가 나누어 맡고, 장면이 커지면 9명까지 늘어난다)로 재분배한다. 코러스는 거기에 칸트, 피히테, 볼테르가 쓴 유대주의에 대한 불관용적 뉘앙스의 글을 맥락 없이 떼어다 인용해오기도 한다. 그러니 이 연출에서 코러스는 말하자면 반유대주의적 기독교의 화신인 셈. 라셰가 러닝머신이나 회전무대 등 원환운동을 하는 기계 위에서 3시간 50분동안 배우들을 끊임없이 걷게 만들면서 발걸음 하나의 속도, 보폭 하나의 거리까지 엄청나게 엄격하게 훈련시킨 코러스를 모든 연출에 활용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잘 훈련된 집단이 무언가를 반대할 때 나오는 폭력적인 에너지를 쉽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후반부에 신전기사가 대주교에게 가 나탄이 레햐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마치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 양 익명으로 꾸며 전달하고 대주교는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면 화형감이라고 응답하는 장면에서, 대주교의 대사를 동시에 말하는 9명의 코러스가 "유대인은 화형에 처해질 것이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무대를 장악하면서 이 폭력성이 가장 극대화된다.

 

  하지만 이런 코러스의 활용이 단순히 반유대주의의 폭력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평이한 독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결말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작품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 신전기사와 레햐가 자신의 출생을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출생을 알게 됨으로써 오히려 정체성에는 혼란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근원을 알지 못하는 것, 그 출신이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 나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고 세 반지의 우화에서 표명된 교훈을 실천할 기반이 되어준다.

  나탄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배우 한 명으로 족하다. 살라딘은 나탄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 시타도 그것을 수긍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도 각각 배우 한 명씩으로 족하다. 신전기사와 레햐는 자신들이 직접 이 세 종교가 뒤섞여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이를 체험한다. 그래서 이 둘도 각각 배우 한 명씩으로 족하다. 이들은 결말에 이르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한지 알게 된다. 그래서 배우 하나가 배역 하나를 맡더라도 괜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야나 대주교는 다르다. 이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신념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때 코러스는 기독교의 신념을 자신의 집단성을 통해 극대화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인물을 여러 배우들에게 분배해서 인물의 정체성을 와해시키기도 하는 이중작용을 한다. 이 이중작용은 사실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다야나 대주교같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을 코러스로 쪼개버림으로써 이들도 역시 불확실한 근원 위에 있음을 보여주며, "유대인은 화형에 처해질 것이다"는 대사, 반유대주의적 대사들을 반복해서 발화함으로써 그의 정체성이 단순히 자기반복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그것은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건 울리케 하스가 코러스를 자신의 출신에 대해 묻지 않고 근원이 없는 존재들로 보는 것과 연결될 수 있겠다)

 

  공연이 원작에서처럼 극적인 출생 폭로와 화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탄과 전체 코러스의 입을 빌어 반지 우화의 마지막 부분을 반복하고 끝난다는 점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그러니 모두가 자신의 반지를 / 진짜라고 믿어라. 아마도 - 너희 아비가 이제 / 자신의 집안에서 단 하나의 반지가 독재하는 걸 더 이상 / 참아주고싶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 분명 - 그는 너희 셋을 모두 사랑했다, 똑같이 / 사랑했다: 한 명을 선택하느라 / 두 명을 억압하길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자! / 모두 그의 공정하고 / 편견 없는 사랑을 본받도록 하라! / 너희들 모두가 경쟁하거라, / 그 반지에 박힌 보석의 힘을 / 드러낼 수 있도록! 온화함으로, / 진심 어린 동정심과 친절함으로, / 신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순종으로 / 그 힘을 돕거라!"

 

  코러스를 포함해 모든 인물들이 이전까지 입었던 검은 베일 옷을 벗고 하얀 타이즈로 갈아입은 후 마지막 장면에서 이 대사를 함께 말한다는 건 참으로 직접적이다. 작가가 직접 말해주는 교훈을 마지막에 넣어서 두 배로 교훈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게 그리 밉지는 않다. 아마도 나탄이 마지막의 "돕거라! zu Hilf'!"를 반복하면서 해피엔딩의 긍정적인 화해가 반감되고 나탄의 고통을 계속될 것임이 암시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오면 이제 마틴 쿠셰가 부르크테아터 상임에 앉으면서 하필이면 이걸 자기 취임 첫 공연으로 올리고 싶어했는지 알 것도 같다. 쿠솃놈의 부르크테아터 상임 포부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만의 부르크테아터가 아니라, 전 유럽, 전 세계의 부르크테아터. 수많은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가 뒤섞이는 공간. 여기서 출신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무용하다. 

  2019년 쿠셰 첫시즌 오프닝 공연으로 왜 이 작품은 무산되고 라셰의 <박코스 여신도들>로 대체되었는지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당시 오스트리아 선거가 있어 그게 작품 선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음. 근데 이게 이제 뭔상관임. 쿠세이 부르크 짤렸는데!

 

  연출에 갖는 불만... 이렇게까지 일정하게 강한 톤을 유지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이걸 거의 4시간을 듣고있으면 정말 피곤하다. 그걸 듣게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지만... 어쩜 이렇게 모든 작품들에서 같은 연출미학을 쓸 수 있는건지 신기하기도 하다. 나탄 역을 여성 배우로 쓴 것에 주목하는 비평도 있는데 이건 뭐... 안그랬으면 오히려 더 구렸을걸?  

  그리고 코러스는 정말... 직접 봐야되는구나. 영상으로는 안되는구나. 나... 연극 좋아하는구나...? 이런 걸 느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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