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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너 뮐러, 교육극과 결별하며 쓴 편지 번역 본문

어디가서 말하면 안되는 것들/번역

하이너 뮐러, 교육극과 결별하며 쓴 편지 번역

허튼 2021. 2. 4. 22:24

In: Heiner Müller Werke. Bd. 5: Schriften. Hrsg. v. Frank Hörnigk. Frankfurt/M 2001. S.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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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abschiedung des Lehrstücks

 

Lieber Steinweg,

 

ich habe mit wachsender Unlust versucht, aus dem Wortschlamm (der Schlamm ist mein Teil) unsrer Gespräche über das LEHRSTÜCK etwas für Dritte Brauchbares herauszuklauben. Der Versuch ist gescheitert, mir fällt zum LEHRSTÜCK nichts mehr ein. Eine Brechtadeptin sagte 1957 gegen KORREKTUR: Die Erzählungen sind nicht adressiert. Was nicht adressiert ist, kann man nicht inszenieren. Die kümmerliche Meinung über Kunst, das vorindustrielle Bild von Gesellschaft beiseite: ich kenne 1977 meinen Adressanten weniger als damals; Stücke werden, heute mehr als 1957, für das Theater geschrieben statt für ein Publikum. Ich werde nicht die Daumen drehn, bis eine (revolutionäre) Situation vorbeikommt. Aber Theorie ihne Basis ist nicht mein Metier, ich bin kein Philosoph, der zum Denken keinen Grund braucht, ein Archäologe bin ich auch nicht, und ich denke, daß wir uns vom LEHRSTÜCK bis zum nächsten Erdbeben verabschieden müssen. Die christliche Endzeit der MASSNAHME ist abgelaufen, die Geschichte hat den Prozeß auf die Straße vertagt, auch die gelernten Chöre singen nicht mehr, der Humanismus kommt nur noch als Terrorismus vor, der Molotowcocktail ist das letzte bürgerliche Bildungserlebnis. Was bleibt: einsame Texte, die auf Geschichte warten. Und das löchrige Gedächnis, die brüchige Weisheit der Massen, vom Vergessen gleich bedroht. Auf einem Gelände, in dem die LEHRE so tief vergraben und das außerdem vermint ist, mußman gelegentlich den Kopf in den Sand (Schlamm Stein) stecken, um weiterzusehen. Die Maulwürfe oder der konstruktive Defaitismus.

 

4.1.1977

 

교육극과의 결별

 

라이너 슈타인벡에게,

 

저는 내키지 않는 마음이 점점 자라나는 것을 느끼며 우리가 나눈 대화의 단어찌꺼기들 (이 찌꺼기는 대화의 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만) 중 제3자에게 유용한 것을 골라내보고자 시도했습니다. 시도는 실패했고, 제게는 교육극과 관련해서 더 이상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1957년에 한 브레히트 전문가는 수정 KORREKTUR에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수신인이 없다고. 수신인이 없는 이야기를 연출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에 대한 빈곤한 의견들, 사회에 대한 산업화 이전의 이미지는 제쳐두고: 1977년 [지금의] 저는 그 당시보다 더 수신인들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작품들은, 1957년에 비해 오늘날에 더, 관객을 향하기보다는 연극을 위해 작성됩니다. 저는 (혁명적인) 상황이 지나가버리기 전까지 그저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초가 없는 이론은 제 분야가 아니고, 저는 생각하는 데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고고학자 역시 아니지요. 그리고 저는, 우리가 다음 지진이 올 때까지 교육극으로부터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처>의 기독교적 종말은 흘러가버렸습니다. 역사는 길거리 위에서의 재판을 연기(延期)해버렸습니다. 학습된 코러스 역시 더 이상 노래하지 않습니다. 휴머니즘은 테러리즘의 형태로만 등장할 뿐이고,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은 시민적 교양의 마지막 경험입니다. 남은 것은: 역사를 기다리는 고독한 텍스트 뿐. 대중의 빈 틈 많은 기억과 깨지기 쉬운 지혜는 망각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가르침이 이렇게 깊이 묻혀 있고 그 밖의 것들이 지뢰처럼 박혀 있는 땅에서는, 계속 지켜보기 위해서 때때로 머리를 모래 (진흙덩어리 바위) 속에 파묻어야 합니다. 두더지 또는 건설적인 패배주의로서.

 

4.1.1977.

 

 

  실러처럼 죽은 지 200년 넘은 인간은 원문도 막 갖다붙여도 되는데 하이너뮐러는 죽은지 꼴랑 20년 좀 넘어서 원문을 갖다붙이면 안 될 것 같다.. 혹시 문제가 될까요? 문제가 된다면 뮐러종친회에서 고소하시기전에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정말 현대 인간 파기 어렵다.. 오역도 제발 알려주세요.

 

  아무튼 여기서 교육극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20년대에 몰두했던 연극 형식. 대부분 사회주의 강령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는 대코러스나 학습된 코러스가 그 강령에 반대하거나 동의하는 개인을 배척하고 흡수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거 너무 파시즘같거든. 처음 읽었을때도 그랬고 브레히트 작품이랑 이론 한 6개월 판 다음에 읽어도 그랬음. 근데 브레히트 전문가들한테는 그게 아닌가봐. 1920년대 시점에서는 이런 형식이 어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강한 희망과 믿음을 담고 있어서 파시즘이라고 말하면 틀린거겠고.. 브레히트 자신도 이후로는 이런 형식에서 벗어나고 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비판하기도 하고.. 다 알겠는데 작품만 똑 떼놓고 읽어본다? 그럼 진짜 몰겠음. 그렇다고 작품 속에서 저런 코러스가 비판되는것도 아니잖아.

 

  이 글에서 번역해둔 하이너 뮐러의 편지는 브레히트 교육극을 7-80년대 당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한 연구자 라이너 슈타인벡한테 쓴 것. 니콜라우스 뮐러-숄이라는 연구자가 벤야민-브레히트-뮐러로 낸 괴물같은 책이 있는데 이걸 난 한 세 번 읽기를 시도하고 세 번 실패했단 말임. 매번 벤야민에서 초장부터 나가떨어졌는데.. 뮐러의 이 편지를 보고 뮐러-숄에게도 벤야민을 뺀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겠구나 싶다. 그래도 너무 어려워. 메시아가 유효한 시대는 지나갔다며...

 이 텍스트가 1977년 초에 쓰였다는 점과 하이너뮐러가 끝까지 동독에 남았다는 점이 정말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교수님 세대에 뮐러가 아이돌이었다면 나는 이제 거기서부터도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너무 재밌고 글 잘쓰는 재수없는 관찰대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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