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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번역] 1797년 12월 26일 예나, 비극은 서사적이어야 한다. 본문

어디가서 말하면 안되는 것들/번역

[편지 번역] 1797년 12월 26일 예나, 비극은 서사적이어야 한다.

허튼 2020. 9. 2. 17:31

* 오역이 많을 테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틀린 곳은 부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  ]: 역자 추가, (  ): 몇몇 관계대명사 절. 원문에서는 괄호가 아닌 콤마 등으로 이어집니다. 강조는 원문을 따릅니다.

 

 

1797년 12월 26일, 실러가 괴테에게 보낸 편지.

97년 한 해 동안 괴테와 실러는 꾸준히 드라마와 서사 사이의 장르규정에 관한 편지를 교환했다. 아래 번역한 것은 그 중 비극의 서사화와 관련된 것으로, 실러 비극이론을 현대로 끌고올 수 있는 한 가지 실마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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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Goethe {Jena den 26. December.}

 

Gegeneinanderstellung des Rhapsoden und Mimen nebst ihrem beiderseitigen Auditorium scheint mir ein sehr glücklich gewähltes Mittel, um der Verschiedenheit beider Dichtarten beizukommen. Schon diese Methode allein reichte hin, einen groben Mißgriff in der Wahl des Stoffs für die Dichtart oder der Dichtart für den Stoff unmöglich zu machen. Auch die Erfahrung bestätigt es; denn ich wüßte nicht, was einen bei einer dramatischen Ausarbeitung so streng in den Grenzen der Dichtart hielt, und wenn man daraus getreten, so sicher darein zurückführte, als eine möglichst lebhafte Vorstellung der wirklichen Repräsentation der Bretter, eines angefüllten und bunt gemischten Hauses, wodurch die affectvolle unruhige Erwartung, mithin das Gesetz des intensiven und rastlosen Fortschreitens und Bewegens einem so nahe gebracht wird.

 

Ich möchte noch ein zweites Hülfsmittel zur Anschaulichmachung dieses Unterschieds in Vorschlag bringen. Die dramatische Handlung bewegt sich vor mir, um die epische bewege ich mich selbst und sie scheint gleichsam stille zu stehn. Nach meinem Bedünken liegt viel in diesem Unterschied. Bewegt sich die Begebenheit vor mir, so bin ich streng an die sinnliche Gegenwart gefesselt, meine Phantasie verliert alle Freiheit, es entsteht und erhält sich eine fortwährende Unruhe in mir, ich muß immer beim Objecte bleiben, alles Zurücksehen, alles Nachdenken ist mir versagt, weil ich einer fremden Gewalt folge. Beweg‘ ich mich um die Begebenheit, die mir nicht entlaufen kann, so kann ich einen ungleichen Schritt halten, ich kann nach meinem subjectiven Bedürfnis; mich länger oder kürzer verweilen, kann Rückschritte machen oder Vorgriffe thun u. s. f. Es stimmt dieses auch sehr gut mit dem Begriff des Vergangenseins, welches als stille stehend gedacht werden kann, und mit dem Begriff des Erzählens; denn der Erzähler weiß schon am Anfang und in der Mitte das Ende, und ihm ist folglich jeder Moment der Handlung gleichgeltend, und so behält er durchaus eine ruhige Freiheit.

 

Daß der Epiker seine Begebenheit als vollkommen vergangen, der Tragiker die seinige als vollkommen gegenwärtig zu behandeln habe, leuchtet mir sehr ein.

 

Ich setze noch hinzu: Es entsteht daraus ein reizender Widerstreit der Dichtung als Genus mit der Species derselben, der in der Natur wie in der Kunst immer sehr geistreich ist. Die Dichtkunst, als solche, macht alles sinnlich gegenwärtig, und so nöthigt sie auch den epischen Dichter, das Geschehene zu vergegenwärtigen, nur daß der Charakter des Vergangenseins nicht verwischt werden darf. Die Dichtkunst, als solche, macht alles Gegenwärtige vergangen und entfernt alles Nahe (durch Idealität), und so nöthigt sie den Dramatiker, die individuell auf uns eindringende Wirklichkeit von uns entfernt zu halten und dem Gemüth eine poetische Freiheit gegen den Stoff zu verschaffen. Die Tragödie in ihrem höchsten Begriffe wird also immer zu dem epischen Charakter hinaufstreben und wird nur dadurch zur Dichtung. Das epische Gedicht wird eben so zu dem Drama herunterstreben und wird nur dadurch den poetischen Gattungsbegriff ganz erfüllen; just das, was beide zu poetischen Werken macht, bringt beide einander nahe. Das Merkmal, wodurch sie specificirt und einander entgegengesetzt werden, bringt immer einen von beiden Bestandtheilen des poetischen Gattungsbegriffs ins Gedränge, bei der Epopöe die Sinnlichkeit, bei der Tragödie die Freiheit, und es ist also natürlich, daß das Contrepoids gegen diesen Mangel immer eine Eigenschaft sein wird, welche das specifische Merkmal der entgegengesetzten Dichtart ausmacht. Jede wird also der andern den Dienst erweisen, daß sie die Gattung gegen die Art in Schutz nimmt. Daß dieses wechselseitige Hinstreben zu einander nicht in eine Vermischung und Grenzverwirrung ausarte, das ist eben die eigentliche Aufgabe der Kunst, deren höchster Punkt überhaupt immer dieser ist, Charakter mit Schönheit, Reinheit mit Fülle, Einheit mit Allheit etc. zu vereinbaren.

 

Ihr Hermann hat wirklich eine gewisse Hinneigung zur Tragödie, wenn man ihm den reinen strengen Begriff der Epopöe gegenüber stellt. Das Herz ist inniger und ernstlicher beschäftigt, es ist mehr pathologisches Interesse als poetische Gleichgültigkeit darin. So ist auch die Enge des Schauplatzes, die Sparsamkeit der Figuren, der kurze Ablauf der Handlung der Tragödie zugehörig. Umgekehrt schlägt Ihre Iphigenie offenbar in das epische Feld hinüber, sobald man ihr den strengen Begriff der Tragödie entgegenhält. Von dem Tasso will ich gar nicht reden. Für eine Tragödie ist in der Iphigenie ein zu ruhiger Gang, ein zu großer Aufenthalt, die Katastrophe nicht einmal zu rechnen, welche der Tragödie widerspricht. Jede Wirkung, die ich von diesem Stücke theils an mir selbst, theils an andern erfahren, ist, generisch, poetisch nicht tragisch gewesen, und so wird es immer sein, wenn eine Tragödie, auf epische Art, verfehlt wird. Aber an Ihrer Iphigenie ist dieses Annähern ans Epische ein Fehler, nach meinem Begriff; an Ihrem Hermann ist die Hinneigung zur Tragödie offenbar kein Fehler, wenigstens dem Effecte nach ganz und gar nicht. Kommt dieses etwa davon, weil die Tragödie zu einem bestimmten, das epische Gedicht zu einem allgemeinen und freien Gebrauche da ist?

 

Für heute nichts mehr. Ich bin noch immer keiner ordentlichen Arbeit fähig, nur Ihr Brief und Aufsatz konnten mir unterdessen Beschäftigung geben. Leben Sie recht wohl.

 

Sch.

 

 

괴테에게 1797. 12. 26.

 

  자유시(Rhapsoden)와 익살극(Mimen)을 그들 쌍방의 청중들을 포함해 비교해보는 것은 이 두 가지의 시작법이 가진 다양성에 접근하기 위한 아주 잘 선정된 수단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방법만이 그 시작법이 소재를 선정할 때나 소재를 다룰 때 저지를 수 있는 조야한 오류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경험이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드라마 작품을 완성할 때 어떤 것이 드라마적 시작법의 경계 안에 그 소재를 그렇게 견고하게 잡아두고 있는지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시인이 그 경계를 넘어섰을 때, 가득 차있고 다채롭게 배열된 집들과 같이 무대가 재현하는 현실적인 것들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격정적이고 떠들썩한 것을 기대하게 함으로써, 따라서 강렬하고 부단한 진보와 운동의 법칙이 그 소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됨으로써 시인은 다시 확실하게 경계 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더 구체화하기 위해 두 번째 수단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드라마적 행위/줄거리 Handlung은 제 눈앞에서 움직이지만, 서사적 행위/줄거리는 그것을 둘러싸고 제가 직접 움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정적으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제 생각에는 이 차이점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사건이 제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저는 감각적인 현재에 강렬하게 사로잡히고, 제 상상력은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제 안에서는 지속적인 불안함이 생겨나고 유지될 것입니다. 이 낯선 폭력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저는 항상 객관에만 머물러야 하고, 반성하고 고찰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제게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사건을 둘러싸고 제가 직접 움직인다면, 저는 앞서 말씀드린 것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주관적 요구를 따를 수 있지요. 길든 짧든 잠시 멈춰 설 수도 있고, 뒤로 돌아갈 수도 있고 또는 미리 앞서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정지해 있는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과거라는 개념에, 그리고 또 이야기라는 매우 잘 들어맞습니다. 서술자는 이미 사건의 시작과 중간, 끝을 알고 있고, 그에게는 줄거리의 모든 순간들의 가치가 전부 똑같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온한 자유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서사시인은 자신이 다루는 사건을 완전히 과거형으로, 비극시인은 완전히 현재형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은 이제 아주 명백합니다.

 

  더 첨언하자면: 이로부터 문학 하위에 있는 세부장르들 간의 매력적인 갈등이 발생합니다.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현재화하는 문학예술[비극]은, 과거의 특징들이 지워지지 않는 한에서 사건을 생생하게 표현하도록 서사시인을 강제합니다. 모든 현재적인 것들을 과거형으로 만들고, (이상성을 통해) 모든 가까이 있는 것들을 멀어지게 하는 문학예술[서사]은,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현실성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트려놓고, 우리의 소재에 대항해 마음에 시적인 자유를 만들어주도록 극작가를 강제합니다. 그러므로 비극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언제나 서사적인 특징으로 상승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를 통해서만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서사시는 드라마로 하강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역시 이를 통해서만 시적 장르개념을 온전히 충족할 수 있습니다. 두 장르를 시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이런 노력을 통해서 두 장르는 서로 가까워집니다. 두 장르를 구분하고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특징은 언제나 시적 장르개념의 두 가지 구성요소 중 하나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서사시에서는 감각성이, 비극에서는 자유가 그러하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결핍에 대항하는 평형추가, 서로 대립하는 시작법의 특수성을 해결하는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들 각각은 그러므로 서로의 장르에 반대하는 시작법을 보호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무분별한 혼합이나 경계 혼동으로 변질되지 않는 이러한 상호간의 노력은, 가장 높은 성취로서 언제나 아름다움을 가진 성격, 충만함과 순수성, 전체와 통일 등을 연결지으려는 예술의 고유한 과제입니다.

 

  당신의 <헤르만과 도로테아>라는 작품에 맞서서 누군가가 순수하고 엄격한 의미에서 서사시라는 개념을 가지고 온다면, 그 작품은 어느 정도 비극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더 진지하고 솔직하게 몰두하고 있으며, 시적인 무관심성보다는 병리학적 관심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배경이 되는 장소가 좁고 인물들이 적은 것, 그리고 줄거리가 단순한 것 역시 비극의 특징에 속합니다. 반대로 당신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비극 개념을 가지고 온다면 분명히 서사문학의 범주에 있죠. <토르콰토 타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피게니에>는 비극이라기엔 대단원은 우선 고려하지 않고 사건을 길게 정체시키는 너무 평온한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비극 개념에 모순되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작용들(일부는 제가 직접, 다른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만)은 장르적으로도 시적으로도 비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비극이 서사적 방법으로 자신을 그르쳤을 경우에는 항상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피게니에>가 서사문학에 근접한 것이, 제 개념에 따라, 실수라면, 당신의 <헤르만>이 비극에 경도된 것은 명백히 실수가 아닙니다. 적어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결코 아닙니다. 비극이 특정한 곳에 필요하고, 서사시가 보편적이고 자유롭게 필요하다는 것이 이 문제의 쟁점일지요?

 

  오늘은 이게 전부입니다. 아직까지도 만족할만한 작업을 할 상태가 아닙니다. 이 와중에 제가 신경을 쓸 만한 것은 당신의 편지와 논문들 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Sch.

 

 

 

공부하면서 번역한 것들 중에 재밌는 건 블로그에 올려 이딴 쓸데없는 것에 관심있는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싶은데.. 논문 쓸 때 내가 번역한건데도 표절도에 잡힐 수 있다고 하니 넘 슬프다. 혹시 있을수도 있잖아요 이딴거를 재밌어하는 어떤 변태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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