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하임은 뮤지컬신

2006 운터 덴 린덴 <카르멘> 본문

오페라, 클래식

2006 운터 덴 린덴 <카르멘>

허튼 2018. 1. 21. 08:19

***********오알못, 클알못 감상 주의************ 




휘: 다니엘 바렌보임

연출: 마틴 쿠세이

출연: 마리나 도마셴코(카르멘), 롤란도 비야손(돈 호세), 노라 암셀렘(미카엘라), 알렉산더 비노그라도프(에스카미요)



쿠세이 필모깨기를 시작했다. 엄청난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은 헝가리 뮤지컬 파시는 모 트친분께서 몇 년 전에 파셨던 연출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새삼 뮤지컬 체스를 검색하다가 저 분이 3년쯤 전에 내게 쿠세이 맥베스 짤을 보냈던 걸 발견하게 되었다. 쿠세이 하면 익히 떠올리게 되는 시퍼런 형광등 조명에 차가운 하얀 벽, 그리고 수없이 많이 굴러다니는 해골이 퍽 인상깊었다. 영상을 찾아봤는데 킨리사이드가 슈렉의 파콰드영주같이 하고 네트렙코랑 같이 나오는 연회장 씬 클립이 있는 것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기괴하고 쌈마이함에 덜컥 치여버렸다. 이거 풀버전이 너무 궁금한데 정발된 영상물은 없고 올해 4월인지 5월에 바이에리셰 슈타츠오퍼에서 다시 한다더라. 킨리/네트렙코/압드라자코프 캐스팅. 보고싶지만 나는 2월말에 독일을 떠나므로 실패다. 이전에 본 쿠세이 연출 프로덕션은 M22 <돈 지오반니> 하나 뿐. 란제리 모델들 데려와놓고 벗긴 후 마네킹처럼 세워 놓은 그 모습을 보고 '으악! 지옥의 대상화다!'라며 기함한 뒤 입덕하지 못하고 튕겨져나와버렸다. (이제는 안다 그게 쿠세이가 빻아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극도의 빻음을 통해 극도의 돌려까기를 시전한 무대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햄슨한테 줘도 안입을 못생긴 셔츠를 입혀놨었음. 이 연출을 팔 수 있겠냐고, 그 셔츠를 보고.ㅋㅋㅋㅋ 여튼 상기의 이유로 쿠세이 필모깨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카르멘>은 가장 최근에 봤던 작품이기도 하고 플롯이 그리 어렵지 않아 자막이 없다는 여건 하에서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이 작품을 필모깨기의 첫 번째 영상으로 골랐다. 그리고 그건.. 나의 큰 오만이었음.

비틀기를 시도한 프로덕션을 제대로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충실한 고전 프로덕션을 몇 편 먼저 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돈 카를로>로 현대적 비틀기를 시도한다면(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이미 너무 촘촘하게 짜여 있어 좀 힘들긴 하겠지만) 나는 필시 그것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이게 무슨 개소리냐며 욕을 할 수도 있겠다. <돈 카를로>는 내가 비틀기의 퍼즐들을 충분히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만큼 알기 때문이다. 현대적 연출이 내게 높은 진입장벽을 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내가 오페라 알못이라는 점. 비교적 충실하게 고전을 따른 메트 카르멘을 바로 며칠 전에 봤지만, '그거 한 편으로는 부족하지 않냐?ㅋㅋ'라며 쿠세이가 비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더라. 게다가 이 프로덕션 <카르멘>은 비제의 음악에 연기를 더했다. 이런 걸 Reigetheater라고 하던가? 마치 징슈필처럼 노래 중간중간에 가수들이 연기를 하고, 그 연기의 비중이 적지 않은 편. 결정적으로 베를린에서 올린 공연임에도 노래와의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 연기 시 대사가 불어다. 자막도 없음. 이 프로덕션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할 것 같은 장면들인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너무 절망적임ㅋㅋㅋ 영상물 자막 붙여서 정발해라, 진짜.



우선 명시해두지만, 나는 이 프로덕션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여러군데에 혹평이 대다수라서 미리 써놔야 한다. 재미있었고, 아는 만큼만 열심히 짜맞췄다. 아는 게 별로 없으니 내가 이 극을 오독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뭐 어때, 극혐하면서 본 사람들보다는 오독한 내게 이 극은 더 가치가 있는 거니까. 몰이해에 대한 떡밥을 열심히 깔았으니 이제 감상을 쓰겠습니다. 


매번 놀라운 점이다. 음악의 어떤 이론적인 부분을 몰라도, 실기적인 부분 또는 연주의 디테일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연주마다 호와 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연주가 좋다면 극에 대한 집중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숫자의 악기가 연주를 해도, 지휘자나 연주자에 따라 극에 각기 다른 종류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그리고 바렌보임은 이 극을 훨씬 뛰어나게 만들어주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음. 내 취향이 바렌보임이었다니.

거기에 도마셴코의 카르멘. 앞으로 어떤 카르멘을 만나도 이 사람과 항상 비교하게 될 거라 자신한다. 앞으로 몇 번 더 언급하겠지만 도마셴코의 깊고 뭉근한 목소리는 악마적인 카르멘을 만들어냈다. 가랑차의 카르멘을 보면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에게 홀려서 인생을 조질 수 있을지는 약간 의심이 된다. 외모적인 문제가 아니다. 가랑차에겐 어떤 숨길 수 없는 건전함이 존재한다. 도마셴코를 보면 호세가 인생을 조진 게 이해가 된다. 조지는 것도 그냥 조지는 게 아니라, 전력을 다해 적극적으로 조질 것 같다.


 카르멘의 첫 등장 씬


비야손이 워낙에 연기를 잘 해서 돈 호세의 설득력은 충분하다. 호세는 처음부터 파멸이 예정되어있는 인물로 보였다. 카르멘이 그의 파멸에 큰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카르멘이 아니었더라도 호세는 어쨌든 죽었을 것. 단지 호세가 서곡이 연주될 때부터 무대 위에서 총살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불안정함은 대사를 못 알아듣는 와중에도 비야손의 연기로 명확하게 보인다. 비야손 노래 못 하게 되면 도밍고옹처럼 바리톤 가지 말고 연기 시작해보자, 제 2의 전성기를 맞게될지도 모른다, 눈썹연기로.


이 프로덕션은 굳이 카르멘 원래 텍스트의 핵심인 성녀와 창녀 이분법을 버리지는 않았다. 미카엘라는 성모 마리아의 상징색인 푸른 옷을 입었고, 카르멘은 창녀의 상징인 검은색과 붉은색을 입는다. 다만 그것은 순결과 정숙의 문제가 아니다. 내게는 차라리 신과 악마의 싸움으로 보였다. 모 리뷰는 이 프로덕션을 "노래하는 고깃덩이(Das singende Fleisch)"라 칭했다. 의미있는 표현이다. 사파리 가이드를 연상시키는 호세의 옷, 카르멘의 가죽 원피스, 무대 바닥에 깔린 모래알들, 어김없이 등장하는 속옷만 입은 앙상블들(트친분이 '사실 쿠세이는 다 벗기고 싶었는데 외설로 잡혀갈까 봐 속옷을 입힌 것'이라 했다. 격하게 동감함), 2막 첫장면에서 무대 위의 범람하는 물을 튀기는 신체-근육들... 이 무대에서 인간은, 특히 카르멘에 매혹된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다. 카르멘이 추동질하는 것은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날것이다. 고기, 배(der Bauch), 본능, 욕구 등으로 칭해지는 그것 말이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속옷인간들.


그리고 쿠세이는 그 날것을 표현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이 프로덕션은 섹스, 폭력, 죽음을 굉장히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노골적인 섹스 묘사와 창녀들에게 집적대는 군인들은 분명히 폭력적이고, 죽음은 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내가 '쿠세이' 하면 기대했던 것은 시퍼렇고 새하얀 형광등 조명과 매끈하고 차가운 벽이었는데, 이 공연에서 그런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무대 위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끔찍하게 어두운 무대와 사선의 구조물이다. 그들은 온 몸으로 타ㅡ나ㅡ토ㅡ스를 외치며 모든 등장인물들을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 프로덕션이 충격적이었던 부분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죽는다! 돈 호세는 처음부터 총살당했고(수미상관 연출이다. 4막 마지막이 서곡과 연결된다.), 미카엘라는 호세가 잘못 쏜 총에 맞아 죽는다. 호세에게 찔려 죽어가는 카르멘 앞으로 투우 경기에서 죽은 에스카미요가 실려나간다. 

이 죽음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게 사용된 장면이 바로 Carreau! Pique.. la mort! 다.


Carreau! Pique.. la mort!. 심장을 꺼내든 앙상블들과 칼을 든 호세.


후기를 찾아보다가 모 블로거분께서 이 장면에 대해 '지금까지 자신의 매력으로 남성들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카르멘이 남성들을 위한 대상으로서의 여성인 자신을 깨달은 이 순간 그녀는 주체화된다'면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카르멘과 같은 여성상은 환상 속 조화로움을 깨트리는 존재로서 무대 위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라고 쓰신 걸 봤다. 나는 반만 동감했다. 카르멘은 죽음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이 순간 주체화된다. 하지만 그녀가 주어진 여성상을 깼기 때문에 죽어야만 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젠더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 에스카미요는 왜 죽게 된 것일까?

나는 이 카르멘에게서 어떠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보지 못했다. 내 무식으로 인한 오독의 가능성이 높지만, 카르멘은 자신의 여성성으로 남성성에 호소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르멘은 단지 날것을 부추겼을 뿐이다. 카르멘에게 성적으로 집적대는 남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카르멘 역시 섹스어필을 열심히 하고 있다. 다만 나는 여기서 '여성적인 것'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 또는 경멸이나 공포가 느껴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다. (내 이러한 독해는 가사와 텍스트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묻어나지 않은 날것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없다. 카르멘은, 인간이 날것과 함께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극도의 공포에 의해 죽는 것이다. 욕망과 육체와 죽음은 자연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 하나다. 인간은 오랜 세월 욕망이 가져오는 파멸을 꺼렸고, 욕망과 날것 자체를 꺼렸으며 동시에 죽음을 꺼렸다. 하지만 그것들의 집약체가 바로 카르멘 아니던가. 신은 모든 서사에서 항상 악마를 이긴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연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덕션의 카르멘은 그래서 악마라고 칭하고 싶었다. 악녀로서의 악마가 아니라, 음습하며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 존재 말이다.



이 공연의 라이트모티브는 붉은 천이다. 붉은 천은 맨 처음엔 총살당하는 호세의 눈을 가리는 안대로 사용되었다가 대부분의 러닝타임동안 카르멘의 몸에 둘러져 있다. 4막에서 이 붉은 천은 앙상블에 의해 짓밟힌 뒤 호세에게로 넘어간다. 카르멘은 붉은 천을 빼앗으려 달려들지만 빼앗지 못한다. 흰 옷을 입은 앙상블이 카르멘과 호세를 둘러싸고, 마치 La Mort때의 분장처럼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다. 체념한 듯 버티고 마주선 카르멘을 호세가 칼로 찌르고, 그 뒤로 죽은 에스카미요가 실려간다. 붉은 천은 다시 총살당하는 호세의 눈을 가리고 호세는 그 안대를 벗어낸 뒤 스스로 총구, 즉 죽음 앞에 선다. 붉은 천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명확하게 결론내릴 수가 없다. 욕망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하다. 불친절하기는. 이 수미상관은 크게 특별하진 않았지만 맨 처음부터 호세의 죽음을 보여준 건 프로덕션 전반에 깔린 죽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게다가 스스로 자기 눈을 가린 붉은 천을 벗어내어 죽음 앞에 홀로 서는 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했음. 아니 미친 허튼 뭘 상징하는지도 못 이해했으면서 감동을 했단 말이냐..



전체적으로 정말 재밌게 봤다. 도마셴코 엄청나게 멋있더라 목소리도 좋고ㅠㅠ 비야손도 잘 했음ㅋㅋ 이 공연이 돈호세 데뷔공연이었다고. 다만 에스카미요는 테디 타후 로데스가 오천배쯤 나았다. 나는 바렌보임이 지휘를 담백깔끔하게 하는 할밴줄 알았는데 세상 이렇게 느끼한 투우사의노래가 또 있을까 싶을정도로 느리게 연주하더라ㅋㅋ 자막이 있거나 해서 대사 부분도 알아들을 수 있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음ㅠㅠㅠㅠ 오페라 파게 될 줄 알았으면 독일어 말고 불어나 이탈리아어 배웠지ㅠㅠ. 아.. 아니 가수들 얼빠짓할땐 독일어가 더 좋은것같긴 하지만ㅋㅋ


다음 리뷰는 취리히 마술피리다. 마술피리를 보고 허튼은 카르멘이 증말 친절한거였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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