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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2022 ~ 박사과정

장학금 면접 후기

허튼 2023. 11. 24. 20:26

탈락한 지원자의 후기이니 정보를 얻고싶으신 분은 잘못 찾으셨습니다...

싱숭생숭한 마음은 어느정도 정리되었으나 그래도 남아있는 정념을 갈무리하기 위해서 씀. ㅋㅋ ㅠ

 

독일에서는 중도보수인 ㄱㅣ독민1주당 산하 재단의 장학금이었음. 원래는 재단의 한국사무소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상대로 따로 장학생을 선발했는데, 2-3년 전부터 더 이상 한국에서의 장학사업은 진행하지 않고 이젠 다른 나라 학생들과 같이 경쟁하게 됨. 그 안에서도 나라별 포션은 있겠죠. 아무튼 나는 정당의 구미에 맞는 사람이 되어보고자 무척 애를 썼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포장해서 밀고 나갔고, 면접관들의 반응을 봤을 때 그 전략은 나름 통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면접관들이 전부 정치학 전공자라 도대체 이들이 내 연구계획을 어떻게 평가한다는 건지, 그리고 연구계획을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면 박사과정생들을 뭘 보고 뽑겠다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재단 인재상에 날 맞추는 전략은 그럭저럭 잘 빌드업이 되어갔다 - 그들이 내게 이-팔 사상검증을 하기 전까지는. ㅋㅋ 면접은 다음의 순서로 진행되었음.

 

 

- 자기소개

    : 도대체 한국에서 독일 연극학을 공부할 결심을 어떻게 한거냐 물어보기에 고등학생때 독일 뮤지컬을 좋아했던 학생이었고 뮤지컬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어서 독일어를 배웠다가 쉴러의 극을 사랑하게 돼서 독문학-연극학까지 왔다고 함... 진짜 인생사 새옹지마네요.

 

- 어떻게 이 재단을 알게 되었으며 왜 이 재단에 지원했는지

    : 독일로 유학 가는데 이 재단을 모르면 안 되는거 아닌가...? 싶지만. 여기서 점수를 좀 따고 싶었음. 한국에서 많은 선배들이 이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했고 그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나와 내 연구가 이 재단의 인재상(Leitbild라는 단어를 썼는데 한국어로는 뭐라 하지)에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 고 운을 떼서 자연스럽게 내 연구주제가 어떻게 서구민주주의와 공동제척 가치를 주목하는지 강조했음. 나는 코러스를 연구하는데 코러스라는 게 태초부터 민주주의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연극적 수단이고 20세기엔 도그마만 반복하는 앵무새로 여겨졌던 적도 있지만 요즘은 갈등과 토의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뤄나가는 과정으로서 활용되고 어쩌구... 진정 우국충정 보수의 민주당이라면. 이걸 떨어트릴 수 있는거니? 음 ~ 있겠죠.

 

- 이 재단은 장학생들이 직접 주관하는 행사들을 자주 연다. 네게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떤 주제의 행사를 꾸리고 싶은지?

    : 좀 당황하고 길게 생각했지만 10월에 참석한 기후위기와 연극 학회를 여기서 어필함. 학회에서 아동 및 청소년들을 위한 연극 실험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가능하다면 나 역시 기후위기에 관해 아동청소년들의 참여적 교육을 위한 연극 워크숍을 열어보고 싶다고 대답함. 면접관 중 한 명이 이 재단도 교육에 큰 가치를 두고 있고 기후위기는 분명 이후 세대에 더욱 중요한 문제이니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줌. 

 

- 봉사활동 Ehrenamtliche Tätigkeit

    : 나는 교내 인권센터에서 조교일을 한 것과 학술지 편집간사일을 한 것을 써서 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물어보기에 전자에서는 여성인권교육, 교내 차별과 관련된 비위 사건 지원 등의 업무를 했다고 대답했고, 후자에서는 <xx윤리>와 <xx정책>이라는 두 개의 학술지에서 일했는데 <xx윤리>가 보다 이론적 차원에서의 쟁점들을 내면 <xx정책>에서 실제 우리나라 환경을 고려한 정책적 아젠다를 논의하는 상보관계를 AI에 관한 윤리적 쟁점을 예로 들어 강조했음. 솔직히 탈락한 지금도 이 부분은 킥이었다고 생각함... 두 학술지의 상보성 부분에서 면접관 반응들이 정말 좋았음. 근데 그게 다 뭔소용이겠니.

 

- 연구주제

    : 재단에 지원한 이유를 물어볼 때 이미 살짝 언급했지만 그래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는 질문이었음. 아까 말한 대로 민주주의적 기관인 코러스를 수단으로 동시대 극작이 공동체와 집단적 정체성, 독일의 기억문화와 역사에 접근하는 방식을 분석한다고 대답함. 그대들이 진정 보수라면... 아니다...

    : 덧붙여 독일 내에서 문학과 연극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강조함. 독문학에서는 현대 연극텍스트에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연극학에서는 아예 텍스트에 관심이 없다. 나는 독문학 베이스를 가지고 연극학과에 입학해 그 사이의 빈틈을 보려는 거고, 독일 지도교수와도 이미 합의를 봤다. 이걸 강조했더니 면접관 중 하나가 연구사적 구멍이 있는 거네요!라며 맞장구 침.

 

- 경제적 상태

    : 자기소개서에 경제적 어려움이 언제나 문제였다고 써둔 것을 짚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물어봄. 역시나 뮌헨 집값을 걱정하며... 거지라는 걸 한껏 어필하며 난 성인 된 이후로 일을 쉬어본 적이 없고 지금은 한국 재단에서 1년 장학금을 받고 나왔고 이 1년간 무조건 다년장학금을 찾아내야 한다. 뮌헨 집값은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라 꼭 장학금을 받고 싶다고 대답함... 진짜 진심........ 장학금 그냥 경제적 지표 제출하라 해서 그거 하위에서부터 잘라라. 그러면 억울하지는 않겠다.

 

- 연극 많이 보는지

    : 이건 왜물어본거지?;; 마침 면접 직전 1주일간 연극을 세 편이나 봐서 그 얘기를 해줌. 하인리히뵐 소설을 연극화한 걸 봤다는 얘긴 하지 말걸; ㅋㅋㅋ 독일에서의 관극 경험이 좋았냐 schön고 물어보길래 좋긴 좋은데 개인적으로는 아름답지 않은 연극 nicht schönes Theater을 보는 걸 더 좋아한다고 대답함... 농담이었는데 면접관들이 비웃음 쩝...

 

 

여기까지 난... 진짜 찢었다고 생각했음. .. 근데 그 질문이 온거임....

 

-  우린 정당장학금이라 이걸 물어보는 걸 이해해달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여기서 살짝 뇌가 멈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은 아니라 좀 우회해서 도망가려는 대답을 만들어둔 상태였지만 진짜로 물어볼 줄이야? 지금 독일 내에서는 마치 모든 팔레스타인인은 반유대주의자에 테러집단이며 이스라엘의 학살에 비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전부 역사를 망각한 나치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어서 정말 당황스러웠다. 내 독일 지도교수님은 시온주의를 비판한 주디스 버틀러가 최근 <차이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에 들어오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을 두고 "우리 세대는 모두 푸코를 읽었지만 푸코에게 아동성착취 스캔들이 있었다고 해서 푸코의 책들을 모두 버리지는 않죠. 버틀러의 책도 그렇습니다"라고 하더라. 그게... 같나요? 독일 대학은 모든 주제에 대한 토론에 비교적 열려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내가 들어가는 모든 수업에서 정말 기를 쓰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에는 눈을 돌리고 있단 말임. 대놓고 3주째 홀로코스트 얘기 하고있는 수업도 이스라엘의 I도 안 나옴. 그런데 이걸 장학금 면접장에서 물어보는 건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압박으로만 느껴졌다.

    : 어쨌든 나는 준비해 간, 도망가는 대답을 함. 우선 나는 모든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자로서 나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왜 폭력에 그렇게 큰 목소리를 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만 한다. 이랬더니 면접관 중 하나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냐고 재차 물어봄. 그냥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임. 그래서 나는 다시 도망가기를 시도함. 내 생각에 가장 큰 문제는 국제관계가 경제논리와 무엇보다 미국의 개입에 너무 큰 영향을 받고 있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따르지 못한다는 점인 것 같다. 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너무너무 비겁하게 도망쳤네. 아무튼 면접장에서는 이 말 밖에는 생각이 안 났다. 어쩌겠니. 내가 자꾸 도망가니까 이제 면접관이 세 번째로 자유민주주의적 자아비판의 기회를 줌. ㅋㅋ

 

- 그렇다면 이제 가자지구 얘기는 하지 말자. 독일 내에 국한해서,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심각한 이 상황을 독일이 어떻게 중재해야겠는가? 당신은 독일이 나치 과거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세요? 팔레스타인 땅 말고 독일 땅을 떼서 유대인에게 주던가...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떨어질 줄 알았다면 좀 더 세게 말할 걸 하는 후회만이 남는다. 저 나치 과거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는 걸 고려하라는 단서가 생각할수록 어이없음... 내가 이 세 번째 기회에서라도 자아비판을 하고 유대인을 지지했다면 합격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음.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단지 - 나는 정치인이 아니고 인문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상호간의 존중 respektvolles Miteinander을 교육하는 것이 사회의 기저를 이루어야 한다 < 뿐이었음... 

 

 

  이러고 나니 면접이 50분이 지나버렸다. 마지막에는 재단 측에 질문이 있냐고 하기에 장학생 행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내 면접에서 내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말해달라는 질문을 했고 면접관 두 명의 Wiedersehen과 한 명의 Tschüss를 받고 방생되었다. 면접 끝나고 나오는데 사람들이 대기업 최종면접에서 임신출산육아 페미니즘 검증 질문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고 그러더라. 간절한 사람들 붙들고 왜 그러는데요. 독일 지도교수님께 일렀더니 암만 정당장학금이라 해도 그렇지 그런 질문은 unfair 하다고 같이 어이없어해주긴 함... 그래요... 

  그리고 들어보니 모든 면접대상자에게 저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근데 나는 왜...? 정당장학금이니 정당의 지향성에 맞는 사람을 찾으려는 것도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수가 아니면 누가 보수란 말이니...? 사람이 아무리 초등학생때부터 조선일보를 읽으며 자라왔어도 거지 집안의 숨길 수 없는 계급적 향취가 있는거니? 결국 너희도 같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끌리는 거니...? 이런 점심병 생각을 지난 1주일간 계속 하게 되더라. 아무리 주변에서 실력보다는 운이 더 많이 좌우하는 게 장학금이라고, 탑급 연구자라면 재단에 본인 자체를 관철시킬 수 있겠지만 그건 탑급 얘기고 어차피 아래로 오면 커트라인은 복불복이라고 위로(후자는.. 위로가 맞나? ㅋㅋㅋ)해주지만... 도대체 내가 그렇게 못난 게 뭔데? 싶어서 분한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진짜 재단 구미에 잘 맞게 준비했다고 생각해서 더 그런듯.

  아무튼 이 정념은 이제 이 글과 함께 해소해버릴 수 있길 바란다. 이렇게 된 이상 박사는 무조건 5년 안에 끝내야만 함. 배수진을 친 거죠. 그것 역시 나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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